자전거 타기는 두 바퀴로 세상에 홀로 설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어렸을 적 우리는 아버지나 형제들의 도움을 받아 자전거 타기를 배운 경험들이 있을 것이다. 이때 뒤에서 잡아 주던 사람들은 배우는 사람이 어느 정도 익숙해 졌다고 생각하면 손을 놓는다. 이때 우리는 이제 세상에 두 바퀴로 홀로 설 수 있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도전 정신을 느끼며 배우게 된다. 자전거 타기는 뒤로 굴러갈 수 없듯이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도전 정신이 아닌가 싶다.이 책의 저자 김훈은 망륙(望六)의 나이에 자전거 페달을 밟고 1년
고향인 신평면 매산리는 내게 늘 따뜻한 보금자리였고 삶의 터전이었으며 꿈을 키우고 희망을 만들었던 인생의 산실이었다. 많은 이들이 고향을 떠날 때 나는 흙의 정직함을 배우며 희망을 찾으려 했고 새로운 도전으로 삶의 보람을 찾았다. 치열했던 인생의 한 시기를 지나 이제 조금은 여유를 갖고 돌아보는 인생의 한 장면은 늘 새롭게 다가온다. 첫 번째 사진은 당진정보고(당시 당진상고) 2학년에 재학하고 있을 무렵 토요일 수업을 마치고 면천의 영탑사에 들러 찍은 것이다. 버스를 타고 비포장길을 달려간 영탑사는 공부에 지친 우리의 마음을 편안하
안녕하세요? 저는 를 통해 힘든 사춘기시절을 한 폭의 수채화로 그려낼 수 있는 방법을 찾은 어여쁜 15살 소녀입니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학교 방과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스멀스멀 기어가는 뱀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는 계절이 찾아오네요. 참고로 저는 거미 다음으로 뱀을 가장 싫어해요. 아마 어렸을 때 할머니 손을 잡고 처음으로 찾은 교회에서 들은 ‘선악과 이야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그땐 왠지 만지면 말카당 하고 미끄러질 것 같은 비늘과 동그라미 속에 징그럽게 그어진 세로 직선의 눈을 가진 뱀의 얼굴이,
내 한 평생은 공직생활로 압축된다. 공직은 내게 직업이자 삶의 목표이기도 했다. 그 동안 무수한 어려움과 좌절도 있었지만 공직생활을 통한 자아실현과 사회에 대한 봉사라는 목표를 포기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토목직 공무원으로, 별정직 우체국장으로, 군의회 의원으로 활동하면서 지역발전을 위해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한다. 첫 번째 사진은 1970년 강원도 철원의 육군 3사단에서 군 복무할 때의 모습이다. 보직은 PX병이었는데 자리가 자리인 만큼 고생하던 동기들보다는 그래도 좀더 편하게 복무할 수 있었다. 솔잎가지로 만든 목걸이를
고향인 우강은 내게 평생을 보낸 마음의 안식처다. 이 곳에서 나고 자라면서 세상에 대한 꿈을 키웠다. 일제시대 말기 수탈의 역사와 동족간 전쟁으로 한 마을 사람들끼리도 총을 겨누어야 했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우리세대들은 숱한 어려움에 처했었지만 결국 이를 극복하고 지금의 이 마을을, 그리고 이 고장을 만들었다. 이제 내 나이도 칠순이 됐다. 세상사 일에 한발 물러나 서예에 취미를 두고 묵향에 취해 지내며 가끔 옛날을 추억해 본다. 첫 번째 사진은 한국전쟁 후인 1950년대 후반으로 우강면 창리의 옛날 집에서 열렸던 누님 유갑준의 결
동북아의 물류중심, 당진의 가능성을 깨닫게 한다저자는 다국적기업을 유치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 한반도의 지정학적 이점을 충분히 살려 한국을 동북아의 물류 중심지로 만들어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우리가 물류 중심지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인가를 냉정하게 검토하면서 한국이 향후 세계경제 성장률이 가장 높을 동북아의 중심에 있고 전세계 및 동북아지역내의 우리나라가 동북아 물류 중심국가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리더십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는 백 번 옳은 말이다. 그러나 단기간에 이룬 압축성장의 결과 우리 국민들의 의식구조에
평생을 교직에 몸담는 동안 제자들과 함께 어울리고 같이 뛰어 놀면서 보람있게 보냈다. 특히 체육에 남다른 관심과 특기를 가진 나는 어려서부터 다양한 종목의 체육경기를 익히며 부임하는 학교마다 좋은 성적을 거뒀다. 초등학교 때 육상에서 출발한 나의 체육인생은 빙상, 축구, 기계체조에까지 이어졌다. 특히 기지초등학교에서 교감으로 재직시 학생들과 어울려 인라인스케이트를 탔던 일은 당시 상당한 화제가 되기도 했다.첫 번째 사진은 1962년 5월19일, 그러니까 내가 신평초등학교 6학년에 다닐 때 5·16기념 초등학교 종합체육대회에서 당진군
‘나’라는 인격체와 인생관을 깨닫게 해준다 어린 시절 나는 무수한 책을 읽었다. 왜 그렇게 읽었는지 어떤 뚜렷한 이유가, 목적 의식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재미가 있어서 읽었는지 아닌지도 모르겠다. 그냥 앞에 뭔가 있으면 닥치는 대로 읽었다. 잠도 자지 않고 책에만 빠져 있는 나 때문에 여간 고생하시지 않은 어머니는 잠 안자고 책 읽겠다고 버티는 나를 여간 기특해하지 않았다.부모 마음 다 그렇겠지만 조상 중에 한 분이 똑똑해서 미쳐 요절한 인물이 있었다나? 중학시절 아이큐 검사를 보면서 담당교사와 어머니께서 크게 놀라신 이후 내가 책
유도는 내 인생에서 전부나 다름없다. 수많은 어려움과 역경 속에서도 오늘의 나를 있게 해줬고 약해지는 자신을 강하게 채찍질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공주사대 부고 1학년 재학시 유도부의 정태수 선생님이 공주경찰서 도장에서 선보였던 ‘허리튀기’ 기술은 어린 내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고등학교 유도부에서 활동하다가 용인대에 진학하게 되면서 나의 유도인생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첫 번째 사진은 1960년대 초반 용인대학에 재학하던 시절의 모습이다. 지금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젊고 패기에 찬 모습이다. 용인대학에 입학할 당시
내 일생은 배드민턴과 늘 함께였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배드민턴은 나에게 신앙이었고 마음의 지주였으며 그 무엇을 주고도 바꾸지 못할 삶의 전부였다. 중학교 때 우연히 체육교사의 눈에 띄어 시작한 배드민턴은 나와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기에 충분했다. 논산이 고향인 나는 배드민턴 순회코치로 발령받으면서 당진과의 길고 긴 인연이 시작됐다.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당진의 배드민턴의 전국을 잇따라 제패하는 모습을 보면서 충분히 보상을 받고 있다.첫 번째 사진은 1980년 3월 서울의 종합체육관에서 열렸던 제18회 전국 춘계종별 배드민턴
작은 배려가 상대의 마음까지 움직인다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밤에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한 손에는 등불을 들고 길을 걸었다그와 마주친 사람이 물었다“정말 어리석군요. 앞을 보지도 못하면서 등불은 왜 들고 다닙니까?”그가 말했다“당신이 나와 부딪히지 않게 하려고요. 이 등불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당신을 위한 것입니다” -바바 하리다스-이 책은 자기중심적 사고방식으로 최연소 나이에 승진하여 다소 우월의식으로 무장된 주인공이 가정과 직장 생활을 하며 미처, 학교에서 충분히 배우지 못한 지혜를 터득하고 몸소 실천해가며 깨달아 가는 삶
내가 농협에 들어간 것은 1972년도였다. 합덕농고를 나와 시험을 치러 당진군농협 합덕지소에 입사를 했는데 당시 월급이 30여만원으로 쌀 한가마값이 2만5천원이었으니 열가마 이상인 셈이었다. 당진군내에는 면천, 합덕, 송악, 천의 등 4개의 지소가 각 마을 이동조합을 관할했었다. 그러다가 75년도에 이동조합이 합쳐져 지금의 면단위 조합이 탄생됐고 조합장 직선제가 도입되면서 지역농협으로 각자의 살림을 꾸려가고 있다.첫 번째 사진은 농협에 입사한 첫해인 1972년도 합덕지소 앞에서 지소장(앞줄 가운데) 송별기념으로 찍은 사진이다. 지금
나이먹음에 맞서 싸우지 말 것을... 모든 것을 의존하기만 해야 되며 무조건적인 사랑과 보살핌을 받는 아기처럼 누군가 목욕을 시켜주고 엉덩이에 크림을 발라주며 마사지해 줄 때 눈을 감고 그것들을 익숙한 일로 여기며 그 과정을 마냥 즐기는 노인이 있다. 그는 78살의 어른으로 치명적인 신경계통의 질환인 루게릭병을 앓고 있는 모리 슈워츠 교수다. 사지를 쓰지 못하게 되고 숨쉬기조차 힘든 원인불명의 불치병으로 삶과 죽음에 직면한 그의 가치관은 오늘을 살고 있는 나에게 많은 의미와 가치를 던져 준다. 우리는 삶과 죽음에 대해 어떤 생각으로
첫 번째 사진은 자유당 시절인 1954년도, 이승만대통령의 생일을 기념해 각 부락 노인들을 초청해 경노잔치를 여는 장면이다. 이곳은 ‘면주막’으로 면에서 맡아놓고 하던 밥집인데 경노잔치뿐만이 아니라 이장회의가 있는 날이나 숙직을 한 면직원들이 밥을 시켜먹곤 하던 곳이다.‘이대통령 각하 제 84회 탄신기념 대호지면 부락 경노회장’이라고 쓰인 팻말이 걸려있다. 옆에 양복을 입고 앉아있는 이가 당시 남상일 면장이고 왼쪽에 주전자를 들고 서 있는 이가 자유당 대호지면책이었던 남창우다.두 번째 사진은 내가 대호지면 재무계장으로 있을때 손흥원
죽음과 탄생을 무력하게 하는 것들 박완서 작가가 창작활동을 시작한 지 삼십년이 되는 해, 「아주 오래된 농담」 이라는 장편소설을 내놓았다. 박완서 작가의 책을 많이 보는 나로써는 어김없이 이 책을 보게 되었다. 박완서 작가의 작품을 읽다보면 언제나 작품 속의 주인공이 내 자신인 것처럼 느껴져 그 작품 속으로 빠져들 때가 많다. 쉽게 접할 수 있는 생활의 소
예전엔 집주인들이 세를 올려 달라는 말을 요즘처럼 쉽게 하지 못했다. 대부분 ‘아들이 건물을 쓰겠다고 한다’거나 ‘내가 직접 가게를 해야겠다’는 식으로 돌려서 말하곤 했다. 무일푼으로 장사를 시작한 나는 집세를 올려줄 형편이 못 되어 열세번이나 이사를 다녀야 했다.첫 번째 사진은 1972년도, 지금의 구 당진경찰서 앞(당문사 자리)에서 잡화점을 하던 때이다. 오른쪽에 살짝 당시의 당진읍내의 비포장 거리가 보인다. 당시 읍내 거리에는 소하천이 두개였다. 간혹 장마철에 하천이 범람해 가게로 물이 들어올 새라 양동이로 빗물을 퍼내던 기억
행복을 찾는 이에게 띄우는 편지 “연탄재 함부로 차지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안도현의 시 ‘너에게 묻는다’의 전문이다. 참 짤막하고도 인상 깊은 시다. 사람들은 진실이 담긴 눈빛과 손길, 그리고 따뜻한 말 한마디를 통해 ‘너’를 이해하고 ‘나’를 이해할 수 있다. 우린 지금 ‘뜨거운 사람’으로 살고 있는가? 여기 자신들이 길모퉁이에 내던져진 연탄재 같은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두 젊은이가 있다. 식은 연탄재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린 두 심장이 진정한 만남과 대화를 통해 서로를 어루만지며 뜨겁게 생의
월사금이 없어 초등학교 졸업장도 받지 못한 나는 일찌감치 객지에 나가 떠돌다가 스무살 되던 해 고향 당진으로 내려왔다. 땅 한평도, 장사 밑천 한 푼도 없었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자장면집 배달부일 아니면 시장에서 100원에 3개 하던 밀가루 빵을 사다가 150원을 받고 되파는 일 등등 이었다. 그러다가 월세 가게를 얻어 빵집을 차렸고 만화가게를 하기도 했다. 도장 파는 기술을 배워서 인문당이라는 가게를 하기도 했고 생활잡화를 취급했다. 미장일을 하셨던 아버지를 따라 보일러 놓는 일을 하기도 했고 연탄숯 장사를 할 땐 새벽 4
최선 다해 ‘오늘’ 살 때 ‘내일’의 행복이...푸르른 대지가 참 아름다워지는 계절입니다. 생명의 기운이 움터가는 대자연의 오묘함을 놓치지 않고 만끽하고 계신가요?행복하십니까? 꿈을 이루셨나요? 아니면 어릴 적 소망했던 각자 각자의 바람은 저 뒤쪽에 숨어있는 채로 현재를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지금은 다행히 “~ ing” 진행형입니까?아니면 이미 포기한지 오래입니까?「긍정의 힘」이라는 책을 읽고 있는 중에 내안의 불끈거리는, 소용돌이치는 그 무언가를 느낍니다. 당신도 함께 느껴보지 않으시려는지요?어떻게 보면 가슴아프게 들릴지도 모르
내가 학교에 입학한 것은 열 살 때인 1937년도, 일제치하였다. 학교명은 당진공립보통학교. 현재 당진초등학교의 전신이다. 학교는 현재 당진군청의 뒤, 즉, 당진성당 자리에 위치했는데 내가 입학한 그 이듬해 지금의 당진초등학교 자리로 이전했다.사진 오른쪽 끝에 보이는 나무는 지금도 건재한 당진성당 은행나무다. 왼쪽에 보이는 한옥은 학교 사무실이었고 은행나무 옆 건물은 교실로 쓰이던 곳이었다.입학식에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부모들이 함께 참여했다. 학생들 뒤로 빼곡히 늘어서 있는 가족들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나는 열 살에 입학했지만 나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