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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현선의 포구 이야기] 한진포구 1, 과거 아산만 일대 가장 큰 규모의 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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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진 서북쪽 끝 행담도와 서해대교가 마주보이는 아산만 어귀에 자리하고 있는 한진포구는 당진을 대표하는 포구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대진(大津)은 신평현에 있고 북쪽으로 114리에 있다”고 쓰여 있는데, 여기에서 언급한 대진이 바로 한진을 일컫는다. 

큰 나루라는 뜻의 ‘한진’ 역사는 1861년 김정호가 편찬한 <대동지지>에도 나온다. 여기에는 “대진에는 백제시대부터 창고와 관아가 있어 당나라를 오가는 상인과 사신이 대진을 통해 왕래하였다”고 쓰여 있다. 현재는 아산만 해안가의 잇따른 간척과 산업단지 조성 사업 등으로 이전의 화려했던 포구와 어업의 번성은 자취를 감추고 관광객들이 찾는 서해의 아담한 포구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한진포구는 20세기까지만 해도 아산만 일대에서 가장 큰 규모의 포구로 어업의 중심지였다. 1970년대 이전 큰덕미와 한진포구에서 파시가 열려 준치를 비롯해 아산만에서 건져 올린 해산물을 사기 위한 선박들이 몰려들었다. 아산만 어업 중심의 포구에는 인천행 여객선이 매일 기착하여, 사람과 물자를 실어 날랐다. 

포구에는 오일마다 한 번씩 한진장이 열려 수산물 거래를 비롯한 상업이 활발하게 이뤄졌다. 한진포구의 번성은 1970년대 근대 산업화의 흐름을 타고 점차적으로 쇠퇴일로에 들어서게 되었다. 가장 먼저 축소된 기능은 해상 교통 기능이다. 

삽교천 방조제의 건설로 육상 교통이 점차 발달하면서 해상 교통이 빠르게 축소되어 갔다. 아산만의 물줄기를 방조제로 하나 둘 막기 시작할 당시만 해도, 한진포구를 비롯한 당진의 어민들은 그것이 아산만 어업에 큰 타격을 가져다주리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실제로 구술 채록 현장에서 만난 대다수의 어민들이 “방조제를 짓는다고 했을 당시에 송악 사람들 모두가 남의 동네일이라고 생각했다”며 “그로 인해 물고기가 줄어들고 생태계에 큰 영향을 끼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고 말했다. 

우현선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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