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
이재무
빈혈의 봄과 폭풍의 여름 지나
한껏 달아오른 절정의 얼굴로
투명한 가을 햇살에 30촉 전구알처럼 반짝이는
그대의 뜨거운 생애 앞에서
나는 오직 겸손의 낮은 자세로 두손 모은다
언제나 그렇듯 위대한 시작은 깨끗한 소멸 뒤에 오는 것
그대의 절정도 적멸을 위한 마지막 제의 같은 것은 아닐까
그대가 바친 낙목(落木)의 사랑은 수목의 더 큰 성장을 가져올 것이다
그러므로 순환은 단순한 등식이 아니다
원의 둘레 넓히는 것이다
단풍이여 붉게 가을을 운다는 것
생의 벼랑 아슬아슬히 통과해온 자의 득의 아닌가
좌절한 자의 비애를 위해
그대가 가을산에 쓴 봉함엽서 읽으며
몇 번이고 놓고 싶었던 생의 밧줄 다시 움켜잡는다
이재무 시집 「시간의 그물」(문학동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