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진군농업기술센터 소장직을 마지막으로 공직에서 물러난 지 어느새 2년이 넘었다. 1975년 서산농촌지도소에서 시작해 당진군농업기술센터를 마지막으로 물러났다. 물론 퇴임한 후에도 평탄한 삶은 아니었다. 그러나 옛 사진들을 돌아보며 추억을 돌아볼 때는 그 당시로 돌아간 것만 같다.첫 번째 사진은 1972년 월남(베트남)전 파병부대인 백마부대원으로 있을 때 찍은
인생은 인연의 연속이다. 숱한 일과 사람과의 인연을 담아온 사진 중 인생에 큰 의미가 배어있는 사진 4장을 골라 세대별 순서로 설명과 함께 조심스레 표현하고 싶다.못 보고, 못 듣고, 모르는 듯 살라는 인생 이순(耳順)기에 접어들어 고향을 떠나 40년 만에 귀향했다. 돌아온 고향에서 훌륭한 많은 분들과 인연을 맺게 되어 큰 보람과 의미를 갖는다.앞으로 뜻을
사람들이 나이를 먹어가면서는 밥보다는 추억을 먹고 살아간다는 말이 있다. 사람의 추억을 대변하기 가장 좋은 것은 바로 사진이다. 혼자하는 회상도 추억을 더듬어 보는 좋은 방법이지만 사진은 당시의 모습과 생생한 현장감이 묻어나기 때문이다. 사진은 한 사람의 인생과 그 사람의 인생 속에 함께한 사람들을 함께 보며 웃고 추억할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첫
뜻밖이었다. 갑작스럽게 걸려온 전화에 부랴부랴 사진을 찾느라 분주했다. 집안 한쪽 구석에 박아두었던 사진첩을 꺼내들자 먼지가 한 가득이다.각양각색의 사진은 많았지만 딱히 소개할 만한 사진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그래도 오래된 추억이 담긴 사진을 고르다보니 자연스럽게 흑백 사진으로 손이 갔다. 지금처럼 깔끔한 칼라사진은 아니지만 흑백사진 나름대로의 미(美)가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호랑이는 가죽을 남긴다는 말이 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남길만한 것이 없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반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는 생각과 함께 뒤를 돌아보고 나를 다잡아 삶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겨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첫번째 사진은 1984년에 찍은 사진으로 60년대 붐이 일었다가 침체기를 걷던 4H 활동이 80년대 초 다
4년 전 암수술 이후 내가 접하는 모든 것이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왔다. 이번 기회에 그동안 찍어 두었던 사진을 뒤적이다 보니 과거의 내 모습이 또 다른 느낌이다. 그렇게 사진을 뒤적이며 혼자 미소 짓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평소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나다. 언제부터인지 디지털카메라가 보급화 되면서 컴퓨터나 CD에 저장된 사진, 인터넷에 올라가 있는
오랜만에 사진첩을 열었다. 뿌옇게 쌓인 먼지 속에서 찾아낸 사진들은 지금까지 잊고 지냈던 지나간 시간들을 다시 되짚어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줬다. 몇 장의 사진을 간추려 내기 위해 이 사진 저 사진을 훑어보니 언제적 사진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합덕읍 재래시장 내에서 소갈비살 전문점 ‘본가’를 운영하며 합덕읍의용소방대 13대
첫 번째 사진은 용인대 유도학과를 졸업하고 공주유도관에서 사범생활을 하던 20대 후반의 모습이다. 당시 공주 경찰서에서 유도시범을 보이는 모습을 촬영한 것으로 손기술 중의 하나인 띄어치기 시범 장면이다. 두 번째 사진은 간판에서도 알 수 있듯 충남경찰국무도장의 모습이다. 당시 유도 교관으로서 활동해 왔다. 아직도 나에 대해서 호서고등학교 체육교사로서만 기억
첫 번째 사진은 신평면 남산리 내가 태어난 고향집을 배경으로 촬영한 사진이다. 1983년도에 촬영한 이 사진 속에서 보이는 초가지붕의 집이 바로 고향집이다. 지금은 집이 헐리고 사라졌지만 사진 속에선 당시 모습 그대로 생생히 자리 잡고 있다. 지금은 집터 뒤에 부모님의 산소만 자리하고 있다. 두 번째 사진은 동학사를 방문한 기념으로 찍은 사진이다. 1980
첫 번째 사진은 1997년경으로 기억된다. 지금은 롯데마트가 자리하고 있는 옛 두산우유 공장의 모습이다. 지금 이곳의 풍경은 사진속의 모습과 비교하기가 쉽지 않다. 한동안 나도 어느 쪽에서 사진을 찍었는지 헛갈렸다. 불과 10몇년이 흘렀는데 이렇게 변해버린 모습이 놀랍기까지 하다. 두 번째 사진은 1998년경 내가 일하던 설악가든 옥상에서 택지개발이 한창 진행 중이던 읍내지구를 촬영한 것이다. 대부분 논이었던 이곳이 지금은 먹자골목과 상가, 원룸촌으로 변해 버렸다.세 번째 사진은 청계천의 모습이다. 난 역사를 기록하고 싶다. 지금
첫 번째 사진은 대전여고 1학년때 전국체전 매스게임에 참가하고 난후 찍은 사진이다. 오른쪽이 나다. 당시 운이 좋아 부상으로 손목시계도 받았던 기억이 난다.두 번째 사진은 대학교 졸업사진이다. 사진 가운데 계신분이 나의 아버님(편쾌남)이시다. 아버지께서는 6.25때 청년반공단체 부단장과 단장을 맡으시며 빨치산 토벌에 나서시기도 했다. 당시 토벌에 나섰다가
지난 세월이 고스란히 담겨진 사진을 보며 다시한번 나에게 다짐해 본다. 이웃들을 사랑하고 함께 살 수 있는 참다운 삶은 무엇인가를 말이다. 어린 시절부터 신앙생활을 해오며 인생 저변에 자리 잡고 있던 예수님 같이 살겠다던 나의 다짐, 어떻게 하면 닮아 갈 것인가라는 고민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첫번째 사진은 내 생애 첫 사진이다. 5살때인 1969년으로
수많은 앨범 속 옛 사진을 뒤적이다 보니 많은 생각과 추억이 교차되었다. 특히 그동안의 삶의 되돌아 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젊은 시절 꽃다운 나이에 시집을 온 부인(홍광자)에게 너무나 고맙고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무원이었던 나를 따라 외지 생활을 하면서 슬하의 1남2녀를 모두 건강하고 바르게 교육시킨 부인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이 들었다.특히
조상 대대로 살아오던 당진읍 시곡리를 떠나 서울행을 한 후 목회자가 되어 다시 돌아온 것이 지난 1995년이었다. 서울 강남구 묘동교회에서 부목사로 있다가 송악읍(당시 송악면) 오곡리에 땅을 기증해줄 테니 개척할 사람을 구한다는 공고를 보고 고향에 돌아온 것이다. 오곡리에 새곡교회를 세우고 사역한 지 13년,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새곡교회는 없다는 사실을
작은 교회에서 담임목사를 맡아오신 아버지(김중회, 69)와 어머니(이은진, 66). 작은 교회에서만 목회를 해오신 덕분에 우리 4남매는 그리 풍족하지 못한 생활을 해왔다. 덕분에 내가 오스트리아로 성악 유학을 가있을 때도 집안의 생활비를 전부 보내야 했을 정도였다. 이런 부모님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가졌던 성악가의 꿈을 이룰 수 있어서 지금도 늘 감사한 마
옛날 사진을 찾다가 초등학교 시절이 생각났다. 대호지면이 고향인 나는 도성초등학교를 다녔는데 도성초등학교는 내가 다닐 시기인 30여년 전에는 지금보다 큰 학교였다. 한반에 40~50명씩, 10개 반이었으니 최소한 500여명의 학생들이 있었었다. 끈끈한 우정을 가진 친구들이 많은데 아직도 지속적으로 연락하고 만나는 친구들이 무척 많다. 도성초 은사셨던 정은탁
갑작스러운 연락이었다. 옛날 사진을 싣고 싶다는 건. 사진을 다시 찾아보았다. 사진을 찾아보면서 새로운 느낌을 받게 되었다. ‘이래서 추억이 소중하다고 하는구나’ 싶다. 참 재밌고 즐거운 순간들이었는데...첫 번째 사진은 참 아는 사람들이 많이 보일 것이다. 호서고등학교 밤절제 때 풍물공연을 하고 난 뒤 찍은 사진. 내 친구들과 선후배
맨주먹으로 뛰어든 농사였다. 앞만 보고 달려왔던 내 삶이었다. 조금의 여유를 갖고 주변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농업경영인 당진군연합회장과 각종 농업단체에서 활동했다. 첫 번째 사진은 내가 스무살 때 1년 후배의 고교 졸업식에서 대합덕리 덕곡마을 친구들이 축하하며 찍은 사진이다. 뒷줄 가운데가 나인데 뒷줄 왼쪽부터 고중원, 유광수, 유선조, 장석산
첫 번째 사진은 합덕성당(구합덕성당)에서 첫 영성체 후 기념으로 찍은 사진이다. 천주교 신자가 아니면 잘 모를 수도 있는데 모태신앙으로 유아세례를 받은 어린이들이 교리교육을 받은 후 처음으로 성체를 모시는 것을 기념하는 것이다. 1963년에 합덕리에서 태어나 함께 어울렸던 고향 친구들이다. 빡빡머리와 단발머리가 정겹다. 지금도 ‘이삭회&rsquo
천안에서 나고 자란 내가 당진에 정착한 지 어느새 10여년이 넘었다. 이젠 ‘당진이 제2의 고향’이라는 말이 무안할 정도로 당진사람이 다 되었다. 첫 번째 사진은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당시 찍은 사진이다. 30여년도 훨씬 넘은 이 사진을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당시 부모님과 월세방에서 살았었다. 저 오토바이는 주인집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