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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6.26 11:33
  • 수정 2023.09.25 17:22
  • 호수 1461

잊혀진 영웅, 어느 참전용사의 일기② 면천면 성상리 조숙연 옹
“전투 패하고 트럭에서 밤새웠던 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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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대 위해 서산에서 경산까지 걸어가…다시 대구까지
잊혀지지 않는 그날의 기억…“트럭서 피가 흐르더라”

 

<편집자주>

70년 전, 사선을 넘나드는 전쟁에 나가 목숨 바쳐 싸우고 고향으로 귀환한 당진의 참전유공자들. 1950년 전쟁 당시 스무 살 무렵이었던 참전용사들의 나이는 이제 아흔이 넘었다. 나라를 위해 전선에 뛰어들었지만 세월의 흐름에 따라 그들의 희생도 점점 잊혀지고 있다. 2500여 명이었던 당진 참전용사 중 2200여 명이 이미 세상을 떠났다. 생의 끝자락에서 회고하는 전쟁의 참상을 기사와 다큐멘터리 형식의 영상으로 제작한다. 대한민국 6.25 참전유공자회 당진시지회를 통해 추천받은 6명의 참전용사의 삶을 오는 11월까지 기록해 나갈 예정이다. 영상은 유튜브 ‘당진방송’을 통해 볼 수 있다.

면천면 성상리의 조숙연 옹이 갓 스무 살을 넘기고 군에 입대하던 그해에 전쟁이 일어났다. 몇 날 며칠을 걸어야 했고, 때로는 죽음을 마주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늘 긍정을 잃지 않았다. 주어진 것에 최선을 다했고, 춥고 배고프던 그때도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7번의 강산이 바뀌었어도 그날의 기억이 또렷하다. 비록 세월에 희미해졌어도 잊을 수 없는 그때의 기억을 그가 꺼내놓았다. 

“쌀 한 가마니 들고 경산까지 갔죠”

조숙연 옹은 서산시 음암면에서 태어났다. 70년 전의 기억은 예산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에 입대하던 그때부터 시작된다. 그의 목적지는 경상북도의 경산. 쌀 한 가마니 지고 그 먼 길을 걷고 또 걸어야만 했다. 

한 번은 당진 합덕과 아산의 신례원 사이에 있는 구양도 다리가 폭격 맞을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그는 “구양섬 다리가 폭격 맞을 수 있다길레 돌고 돌아 얕은 물가를 숨어서 건넜던 기억이 난다”며 “그때 포가 떨어지긴 했는데 맞추지 못했던 것이 기억난다”고 말했다. 

“그때 인솔자가 사돈의 팔촌쯤 됐어요. 그때 ‘아저씨’라고 불렀었는데, 인솔자 따라서 쌀 한 가마니 지고 대구까지 몇날 며칠을 걸었죠. 걷다가 이름 모를 마을에 도착하면 이장으로 보이는 집에서 잠을 잤어요. 한 방에 몇 명이 묵었었는지…, 처음엔 한 100명이 같이 서산에서 떠난 것 같은데 도착하니 50명 정도 남았더라고요. 근데 그때는 고생이라 생각도 못했네요.”

“트럭 위에서 몇날 며칠 밤새”

목적지에 도착한 그는 마침 헌병을 모집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지원했다. 헌병 시험을 합격한 그는 다시 전방으로 올라갔다. 지금까지 그가 잊지 못하는 바로 패전 당시다. 그는 “패전의 설움은 말도 못한다”고 말했다. 

7사단에 속해 양구에 있을 때 코앞까지 전쟁이 벌어졌고 헌병인 그 역시 총을 들어야 했다. 그러나 전투에서 패하게 됐고, 1사단과 맞바꿔 화천으로 향하는 길에 올랐다. 그는 “양구에서 화천가는 그 길이 너무 힘들었다”고 회상했다. 

화천으로 향하던 길, 길게 늘어선 트럭에는 전쟁으로 인해 다친 이들은 물론이고 목숨을 잃은 전우들도 있었단다. 그는 “양구에서 화천으로 넘어갈 때 한 언덕을 오르던 트럭 적치함에서 뻘건 피가 줄줄 흐르던 게 생각난다”며 “오가는 차에서 부상입은 사람도 있었고, 더러 죽기도 했다”고 말했다.

“양구에서 화천 갈 때 건너야 하는 다리가 하나 있었어요. 차들이 동시에 오갈 수 없는 길이었죠. 저희는 패전했기에 다리를 건너는 순서가 뒤로 밀렸었어요. 그래서 트럭에서 며칠을 잤죠. 그때 참 추웠었어요.”

“참 겁 없던 때였죠”

조 옹은 전쟁이 끝나기 전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제대 전 건강이 안 좋아지면서 제대 심사를 요청했고, 이게 받아들여지며 군 생활을 마쳤다. 서산으로 오고 나서야 종전 소식을 들었단다. 그는 “그때는 전쟁이 무섭거나 어렵지 않았다”며 “어렸기도 했고, 그냥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후 서울로 떠나 법원에서 20여 년 동안 근무하다 후에는 법무사로 재직했다. 대한법무사협회장 등을 맡는 등 사회활동을 통해, 공로를 인정받아 1992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기도 했다. 퇴직 후에는 선조의 고향인 순성면 백석리와 가까운 면천 성상리에 터를 잡고 살아오고 있다. 

“200m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인민군과 총을 겨누기도 하고, 된장 푼 물에 밥만 먹고 지내던 때, 한참을 걷고 또 걸어야 했어도 그저 주어진 것으로 생각했어요. 나만 어려운 게 아니고 다 같이 어려운 때라 그랬던 것 같습니다. 참 겁 없던 때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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