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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6.09 20:43
  • 수정 2023.09.25 17:22
  • 호수 1459

잊혀진 영웅, 어느 참전용사의 일기① 면천면 송학리 임종태 옹
총알 피해 시체더미 속으로 파고든 그날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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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례 올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입대 그리고 참전
일등중사로 전역하기까지 7년 동안 군 생활
참전 후 원인 모를 청력 손상으로 평생 살아

 

<편집자주> 

70년 전, 사선을 넘나드는 전쟁에 나가 목숨 바쳐 싸우고 고향으로 귀환한 당진의 참전유공자들. 1950년 전쟁 당시 스무 살 무렵이었던 참전용사들의 나이는 이제 아흔이 넘었다. 나라를 위해 전선에 뛰어들었지만 세월의 흐름에 따라 그들의 희생도 점점 잊히고 있다. 2500여 명이었던 당진 참전용사 중 2200여 명이 이미 세상을 떠났다. 생의 끝자락에서 회고하는 전쟁의 참상을 기사와 다큐멘터리 형식의 영상으로 제작한다. 대한민국 6.25 참전유공자회 당진시지회를 통해 추천받은 6명의 참전용사의 삶을 오는 11월까지 기록해 나갈 예정이다. 영상은 6월 말 유튜브 ‘당진방송’을 통해 볼 수 있다.

면천면 송학리에 거주하는 임종태 씨와 아내 전종례 씨
면천면 송학리에 거주하는 임종태 씨와 아내 전종례 씨

 

면천면 송학리에 사는 93세의 임종태 씨는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입대하기 전까지만 해도 세상 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집집에 동네 사람들 이름도 다 알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은 척척 해냈다. 하지만 입대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난 전쟁이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그의 군 생활은 길었다. 입대 후 전쟁이 벌어졌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기까지 장장 7년이 걸렸다. 지난한 군생활이었다. 임 옹은 “이제 기억도 나지 않는다”며 “말할 것이 없다”고 주름진 손을 저었다. 

그래도 또렷하게 떠오르는 기억들이 있다. 항상 죽음이 따라다녔던 전쟁통에서 살아남기 위한 처절했던 몸부림, 같이 참전해 동고동락을 같이했던 전우의 죽음. 전쟁으로 가엾이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희생 등은 70년이 지나도 여전히 선명하다.

1.임종태 옹이 한평생 가지고 다니는 지갑에는  참전용사 유공자증이 들어 있다.
1.임종태 옹이 한평생 가지고 다니는 지갑에는 참전용사 유공자증이 들어 있다.

 

살기 위해 시체 속으로 파고 들어

임 옹은 일찍이 세상에 홀로 남겨졌다. 그의 나이 2살에는 어머니가, 10살에는 아버지가 작고했다. 그는 같은 동네에 살던 전종례 씨(90)를 만나 백년가약을 맺었다. 으레 그랬듯 서로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혼례를 올렸다. 결혼 후 바로 이어진 임 옹의 입대로 신혼의 단꿈도 펼칠 수 없었다. 

송학리에서 나고 자란 그가 제주도까지 건너가 훈련을 받았다. 하지만 훈련도 다 받지 못한 채 참전해야만 했다. 그는 “당시 반찬 없이 쌀알이 날리는 안남미를 먹은 기억이 난다”며 “배곯아 가며 전쟁을 치렀다”고 회상했다. 짐 싣는 열차를 타고 부산에서 전방이 있는 강원도로 떠났다. 

한참의 세월이 지나 그때의 기억이 또렷하지 않다. 하지만 임진강 근처에서 벌어진 전쟁의 참상은 여전히 남아 있다. 포탄이 떨어지고 총알이 비껴갔다. 전우들이 죽고 시체는 산처럼 쌓였다. 그는 아직도 그때가 기억난다. 죽음의 그림자가 임 옹의 턱 아래까지 올라왔을 때 그는 살기 위해 시체 산으로 숨어 들었다. 

붉은 피로 젖어 들은 시체 사이에 몸을 숨기고 숨죽여야만 했다. 아군이고, 적군이고 시체를 뺏기지 않기 위해 잡아 끌어갔다. 혹시라도 산 사람이 있을까 죽창으로 찔러댔다. 임 옹은 살기 위해 시체 사이로 더 파고 들었다. 여전히 그때의 기억이 그는 잊혀지지 않는다.

임종태 옹의 군인 시절
임종태 옹의 군인 시절

 

“나는 총이라도 있었는데”

“밥 주던 취사병들이 있었어. 산 너머로 밥통 짊어지고 오는데 그들 위로 포탄이 떨어졌지. 사람도 죽고 밥통도 날아가서 그날 우리는 굶었어. 무엇보다 그 사람들이 불쌍하지. 우리는 죽기 전에 총이라도 쏠 수 있잖아. 그 사람들은 그것도 못 하고 그저 죽었어.”

아내와는 편지를 쓰며 서로를 위했다. 글을 읽지 못하는 아내는 그에게 편지가 오면 사람들에게 물어 남편의 소식을 듣고, 하고 싶은 말을 부탁해 적어 보냈다. 

전쟁은 3년 동안 지속되다 1953년에 이르러서야 휴전됐다. 임 옹은 휴전 후 비무장지대 상황실에서 근무를 이어갔다. 한 번은 아내 전 씨가 먼 길 걸어 그를 찾아왔다. 하지만 하늘이 무심히 임 옹이 훈련을 나가 서로 만날 수 없었다. 그때의 설움이 아직도 남아 임 옹은 7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술 마실 때면 노래를 부르곤 한다. 

“물어물어 찾아 와서 / 그 임이 계신 곳을 / 차가운 밤바람 몰아치는데 / 그 임은 없네 / 저 달 보고 물어봤나 임 계신 곳을 / 울며불며 찾아봐도 그 임은 간 곳이 없네.” 

임종태 옹의 군인 시절
임종태 옹의 군인 시절

 

“전쟁, 더 말할 것도 없네”

그 당시 계급으로 일등중사로 제대했다. 제대까지 7년이 걸렸다. 그렇게 다시 돌아오면 평범한 삶을 살 줄 알았다. 하지만 쾅쾅거리는 포탄소리, 총소리 때문인지 그의 귀는 전처럼 소리를 잘 듣지 못했다. 

여러 병원을 전전해도 해결되지 않았다. 병원에서는 고막에 이상이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귀가 잘 들리지 않으니 두통이 생기고, 사람들이 하는 말을 잘 듣지 못했다. 제대 후에도 삶은 팍팍했다. 어렵게 남의 집 일을 거두고, 농사 지으며 그렇게 가정을 일궜다. 지금은 슬하에 딸 셋, 아들 셋을 두고 있다. 아내 전 씨는 “남편 제대 후 고추와 담배 농사로 그렇게 애들 키웠다”고 말했다. 

“나는 전방에서 싸우고 아내는 시골에서 시집살이하느라 우리 참 불쌍했지. 전쟁. 이제는 더 말할 것도 없네.”

※ 이 기사는 2023년도 충청남도 지역미디어지원사업으로 시행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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