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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읍면소식
  • 입력 2023.07.14 21:37
  • 수정 2023.08.17 09:32
  • 호수 1364

잊혀진 영웅, 어느 참전용사의 일기③ 우강면 내경리 조국형 옹
“죽거나 팔·다리 잘린 전우들 숱하게 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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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먼저 입대한 형은 전투 중 행방불명
가장 큰 설움은 배고픔…‘마른 명태’라 불려

 

 

70년 전, 사선을 넘나드는 전쟁에 나가 목숨 바쳐 싸우고 고향으로 귀환한 당진의 참전유공자들. 1950년 전쟁 당시 스무 살 무렵이었던 참전용사들의 나이는 이제 아흔이 넘었다. 나라를 위해 전선에 뛰어들었지만, 세월의 흐름에 따라 그들의 희생도 점점 잊히고 있다. 2500여 명이었던 당진 참전용사 중 2200여 명이 이미 세상을 떠났다. 생의 끝자락에서 회고하는 전쟁의 참상을 기사와 다큐멘터리 형식의 영상으로 제작한다. 대한민국 6.25 참전유공자회 당진시지회를 통해 추천받은 6명의 참전용사의 삶을 오는 11월까지 기록해 나갈 예정이다. 영상은 유튜브 ‘당진방송’을 통해 볼 수 있다.

 

1932년, 조국형 옹은 가난한 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 형 한 명이 있었다. 형은 그보다 한 달 앞서 군에 입대했다. 제주도 훈련소에서 그는 1연대, 형은 7연대였다. 한 공간에 있어도 만나기가 쉽지 않았단다. 

모든 연대가 참여하는 운동회 날이라도 형을 만날 수 있으려나 기대했건만, 마침 형이 배피(배탈)가 심해 나오지 못했다. 당시 스무 살이었던 조 옹은 매운 걸 먹어야 배피가 낫는다는 생각에 고춧가루며 고추장을 어렵게 구해 사람을 통해 형에게 보내기도 했다. 

훈련소에서 형과 만났던 날은 단 하루였다. 형이 훈련소를 떠나기 전날, 그를 찾아왔다. 담배를 모아 둔 그는 이를 팔아 주보(물건을 파는 곳)에서 음식을 사서 가진 돈과 함께 형에게 건넸다. 형은 그에게 ‘몸조심하라’는 말을 전했고, 이는 형에게 들을 수 있었던 마지막 말이 됐다. 대구에서 벌어진 토벌 작전에 참여한 형은 생사를 알 수 없는 ‘행방불명’ 상태로 생을 마쳤다. 그는 “당시 사상자가 많아 눈에 띄지 않으면 그냥 행방불명이 됐다”며 “제주도 훈련소에서 본 형의 모습이 마지막이었다”고 말했다. 

전쟁은 많은 이들에게 아픔을 남겼다. 자신의 목숨을 내놓아야 했고, 사랑하는 가족을 잃어야만 했다. 역사는 세월로 흐려졌지만 조 옹에게 전쟁의 참상은 어제 일과 같이 또렷하게 남아있었다. 

 

부둣가서 나뭇가지 줍던 7살

조 옹은 홍성에서 태어났다. 원래 고향은 지금 살고 있는 우강면 내경리였지만, 가난한 시절을 벗어나기 위해 아버지는 고향을 등지고 서산을 거쳐 홍성으로 떠났다. 그때 조 옹이 태어났고 3살 무렵에 다시 당진으로 오게 됐다. 작은아버지가 담집(재목을 쓰지 않고 흙담이나 죽담을 쳐서 벽체로 삼고 지붕을 얹은 집)을 마련해줬다. 그 시절이 모두 그랬듯 살기가 쉬이 나아지지 않았다. 겨우 7살이었던 조 옹은 작은아버지가 인천에 차린 고무신 공장으로 떠났다. 

인민군에 점령된 동네 

당시 우강면 강문리에서 인천까지 똑딱선이 오갔다. 8살의 조 옹은 그리운 고향으로 내려가려고 배를 타려 했으나 당숙에게 걸렸다. 당숙에게 번쩍 들려 집에 가 혼나야만 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도망쳐 결국 고향에 내려왔다.  

일본으로부터 해방이 된 것은 그의 나이 14살 때였다. 미처 마치지 못한 학업을 위해 동생 이름으로 내경국민학교에 들어갔다. 14살의 나이에 8살 나이로 국민학교에 입학하니 한 달 만에 2학년이 됐고, 또 다시 한 달 후에 3학년이 됐다. 

내경초등학교 1회 졸업생이 된 그는 졸업 후 청년이 되어 마을 통장 일을 맡았다. 통장 일을 할 때 6.25 전쟁이 벌어졌다. 그는 “당시 마을이 인민군에 점령 당했다”며 “집집마다 소련 국기가 날리고 북한 노래가 흘러나왔다”고 회상했다.  

“제주도로 가던 배가 요동쳤지”

한 달 먼저 떠난 형에 이어 스무 살이었던 그에게도 입대하라는 영장이 날아왔다. 신체검사는 논산훈련소에서 이뤄졌다. 군산을 거쳐 훈련장이 있는 제주도로 향했다. 짐 싣는 배 칸에 헌 가마니를 깔고 누웠다. 당시 바람이 크게 불었는지 배가 심하게 요동쳤다. 조 옹은 “그때 바닥에 나뒹구는 주먹밥을 주워먹은 기억이난다”고 말했다.

“48일간 하사관 훈련, 죽을 뻔 했어”

제주도 훈련을 다 마칠 무렵 친구가 하사관 학교에 가자고 제의했다. 하사관 학교에서는 48일간 훈련이 이뤄졌다. 그는 “죽을 뻔했다”고 떠올렸다. 모든 지 ‘5분’이었다. 밥 먹는 것에 씻는 것, 무기 정리하는 것도 다 5분 안에 해야 했다. 한 번은 무기 청소가 불량했다며 곡괭이로 어깨를 두 어대 맞았다. 그는 “그때 맞은 게 한 달은 뻐근하더라”고 말했다. 

훈련 중에는 배고픈 게 가장 설움이었다. 배고픈 것을 참지 못하는 친구는 밤마다 취사장을 돌아다니며 누룽지라도 먹기 위해 돌아다녔다. 집에서 떠나올 때 팬티 안 쪽에 주머니를 만들어 숨긴 돈을 꺼내 음식을 사서 먹이기도 했단다. 

“그때는 안남쌀에 국 하나 줬지. 국에 시래기라도 들어 있으면 운 탄 사람이지. 보통은 소금국 조금이었어. 그때 부산 사람들이 군 주변을 지나가곤 했는데 우리를 볼 때마다 너무 말랐다고 ‘마른 명태’라고 부를 정도였으니 말야.”

“이슬 내리면서 시작된 기습전”

훈련을 마친 그는 1953년 2월, 무기 옮기는 기차 짐칸에 타고 춘천 보충대로 떠났다. 낮에는 다른 기차가 움직여야 하니 밤마다 조금씩 이동했다. 부산에서 춘천까지 장장 이틀이 걸렸다. 춘천 보충대에 가니 아무것도 없었다. 철로 만든 군모는 때로는 밥통이 됐고 교육받을 때는 의자가 됐단다. 숟가락과 젓가락도 없어 나무를 잘라 사용했다. 이후에는 최전방에 배치됐다. 땅 파서 만든 굴에서 자고 보초를 섰다. 주로 방어전이었지만, 두 번 정도 기습전에 참여했다. 그는 “기습전에 나가기 전에는 평소보다 밥을 잘 준다”며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으니 제삿밥 같은 의미였다”고 말했다. 

“우리고, 상대고 다 기습을 했어. 기습은 깜깜한 밤보다는 새벽에 이뤄지지. 이슬이 내려서 낙엽이 젖었을 때, 그때는 발소리가 안 나거든. 사람들이 움직이면서 피리 소리를 내기 때문에 피리 소리를 들으면 위험하다고 할 수 있었어.”

늑막염으로 후방 배치 

전후방 교대가 이뤄지고 후방에 오자 조 옹은 옆구리 쪽에 통증을 느꼈다. 군의관이 보더니 주사기를 푹 찔렀단다. 그때 물이 나왔고 늑막염 판정을 받았다. 중환자가 된 그는 대구에 있는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는 “당시 휴전 시기로 양쪽 나라에서 조금이라도 땅을 더 뺏기 위해서 밀고 올라갔다가, 밀려 내려오던 때였다”며 “그때 사람이 많이 다치고 죽었다”고 말했다. 이어 “죽거나, 팔과 다리가 잘린 사람을 숱하게 봤다”며 “의료 인력이 부족하니 걸을 수 있는 사람은 고향으로 가라고 하더라”고 말했다. 

고향에서 치료를 마친 그는 다시 육군본부 직할부대에 소속돼 지리산에 갔다. 그의 임무는 숨어 있는 적군 토벌이었다. 그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 끝나고 다시 부산으로 내려가 부두 경비를 맡았다. 잠시 휴가를 얻어 집에 왔다 다시 부산으로 돌아가니 부대가 해체됐다. 그러고 다시 제주 훈련소로, 또다시 논산훈련소로 오게 됐다. 

“그동안 고생했소”

그가 제대한 것은 1958년. 그는 “당시 이등병, 일등병, 하사, 중사, 일등중사, 이등상사, 일등상사 순이었는데 그때 하사관 학교를 나온 나는 일등중사로 제대했다”며 “훈련병 교육을 끝으로 제대했다”고 말했다. 

한 선임병이 그에게 제대하면 자신의 회사로 올 것을 권유했다. 부산에 있는 회사로 오면 대우를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집에 돌아가니 아버지와 형은 없고, 어머니와 동생 셋만 남았다. 떠날 수가 없던 그는 그렇게 고향에 자리를 잡고 억척스럽게 살아왔다. 제대 후의 삶도 어렵긴 마찬가지였다. 

91살이 된 그는 요즘 ‘집머슴’이 됐단다. 3살 어린 아내가 건강이 좋지 않아 대신 집을 돌보고 종종 밭일을 나간다. 함께 고생한 그의 아내, 그리고 어쩌면 자기 자신에 스스로 말을 건네곤 한다. “나 봐. 귀 먹었어도 잘 들어. 그동안 고생했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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