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첩을 열어보니 그동안 쌓인 먼지와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동안 방 한쪽 구석에 고이 모셔두기만 했던 사진첩 안에는 잊고 지냈던 내 모습과 추억이 가득했다. 한참을 사진첩을 뒤적이는 내 모습에 아내도 웃음이 났는지 결혼사진이며 총각 시절 사진이며 이것저것을 함께 뒤적였다. 시간에 쫓겨 뒤돌아 보지 못했던 추억을 다시 회상하니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흐른다.첫 번째 사진은 양평 부근의 용문산 일대에서 찍은 사진으로 기억된다. 좌측부터 친구인 최희섭, 최성호와 함께 찍은 사진이다. 현재 희섭이는 서울에서 살고 있고 성호
제주도는 나에게 특별한 장소다. 젊은 시절을 제주도에서 보냈고 많은 사람들과의 추억과 아름다운 경치를 떠오르게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최근 구럼비마을에서 제주도해군기지 건설로 인해 전국이 떠들썩해 아쉬운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첫번째 사진은 제주도에서 군생활을 하던 당시의 사진이다. 해병 헌병대 지프차에서 사복을 입고 찍은 사진이다. 군복보다는 사복을 입고 생활을 많이 했던 기억이다. 두번째 사진은 당시 군차량으로 나왔던 포니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다. 지금은 찾아 볼 수 없는 차량이지만 당시만해도 고급차량으로 손꼽히는 모델이었다.
가족이라는 단어는 언제 들어도 따뜻한 단어다. 세상살이가 힘들고 지칠 때면 아무런 보상도 이유도 없이 기댈 수 있는 든든한 울타리다. 내 인생에 가장 큰 행복이자 축복인 가족들과의 추억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을 내게 선물한다. 첫 번째 사진은 용무치항에서 만난 아내(유미자)와 결혼을 약속하고 찍은 사진이다. 용무치항 부근 해안부대에서 복역 중이던 나는 매일 아침이면 마을에 있는 우물물을 길어 날랐다. 당시에는 수도설비가 잘 되어 있지 않아 부대 내 식수를 공급하기 위해 마을 우물물을 사용해야만 했다. 이 우물은 우연스럽게도
막상 오래전에 찍었던 사진을 사진첩에서 꺼내어 보니 이런 때가 있었구나하는 생각이 든다.그동안 농사를 지으며 농민단체, 새마을지도자, 이장 등의 활동을 하다보니 집안일과 농사일에 고생이 많았을 아내(성월순)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묵묵히 내 뒷바라지를 해온 아내에게 감사한다. 첫번째 사진은 아내와 결혼식을 올리던 사진이다. 당시 예산군 신양에 위치한 처가에서 찍은 사진으로 정통혼례를 마친 후 찍은 사진이다. 처가에서 혼례를 마치고 아내와 함께 본가로 돌아와 예식잔치를 벌였다.지금의 예식문화와 비교한다면 조촐하게 치러진 결혼식이지만
오랜만이다. 젊은 시절의 나는. 옛 모습의 내가 사진 속에서 지금의 나를 반긴다. 어색한 교련복도 옷 입는 스타일도 지금 보면 웃음이 절로 나오는 것들 뿐이다. 요즘 인화되는 선명한 사진에 비하면 형편없는 색채의 사진들이지만 가만히 들여다 보고 있노라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묘한 감정이 샘솟아 난다. 첫 번째 사진은 학창시절 친구들과 함께 교련시간에 찍은 사진이다. 당시에는 교련복을 입고 각종 제식훈련을 받던 시절이었다. 지금의 학생들에게는 생각지도 못한 과목이 아닐까 싶다. 교과 과정에 제식훈련이라니. 하지만 당시에는 제식훈련이
추억이 될 만한 사진을 고르자니 고민이 많이 됐다.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해도 될 내용일지, 의미가 있을지를 생각하며 과거의 추억을 곱씹어 봤다.많은 추억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며 세월의 흔적들을 찾을 수 있었다. 내가 살아 온 발자취가 사진 한 장마다 고스란히 배어있기 때문이 아닐까. 첫 번째 사진은 온양여고 시절 친구들과 수학여행에서 찍은 사진이다.(우측 두 번째) 우리는 경포대해수욕장에서 바닷가에 발을 담그고 당시의 추억과 우정을 사진 속에 담았다. 내 주변에는 항상 많은 친구들이 있었고 평소 사교성이 좋았던 난 친구들 사이에
광고업계에 종사한 지도 벌써 30년이 지났다. 숫자로는 긴 세월이지만 그동안 어떻게 지나간 세월인지도 모른채 앞만 보며 달려 왔다.시간이 변하고 나이가 들어도 마음은 항상 그대로인 나를 추억한다.첫 번째 사진은 군 복무 시절에 찍은 사진이다. 성탄절을 기념해 부대원들과 다과를 즐기며 장기자랑을 했던 기억이다. 앞에서 군복을 입고 노래를 부르고 있는게 나다. 두 번째 사진은 당진에서 한국광고사업협회 충청남도지부 하계 회원 가족 체육대회 때 찍은 사진이다. 1998년도에 촬영한 이 장소는 난지도 수련마을의 해변가다. 당시 당진군지부 지
바쁘게 살다 보니 앨범은 거의 꺼내 본 적이 없다. 오랜만에 보니 감회가 새롭다. 앨범 속 지난 날들이 있기에 현재가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현재가 있기에 지난 날들이 소중한 것처럼.첫 번째 사진은 1985년도 관내 어르신들을 모시고 시가지를 행렬하면서 효도관광 형식으로 진행한 행진 행사 때 찍은 사진이다.현재의 당진 시가지 모습이 아닌 낯선 풍경이 되어 버렸지만 당진이 발전해 온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중요한 풍경이다. 도로를 행렬하고 있는 차량들은 당시 모범운전자연합회 회원들의 택시들로 차량에는 지역 어르신들이 타고 있다.
세월은 무심하게도 금세 흘러 버렸다. 윤기있는 검은 머리가 이제는 하얀 백발로 퇴색됐다.시간이 흐르는 동안 변해버린 내 모습에 문뜩 옛 추억을 떠올리고는 한다.첫 번째 사진은 옛 차부의 윗편 동산이다.나를 중심으로 사진 좌측편에는 초가집도 보인다. 우측으로는 농협창고도 보이고 있다. 약 42년 전 당진의 시가지 모습이라면 지금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것이다. 두번째 사진은 20대 초반이었던 때로 기억되는 사진이다.당시 당진시가지에는 벚꽃터널이라고 불리는 벚꽃길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듬성듬성 참 볼품도 없는 길이었는데 당시에는
어린 시절부터 사진 찍는 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한쪽 구석에 제쳐뒀던 몇 안되는 사진들을 둘러보니 느낌이 새롭다. 젊은 시절에는 사진첩을 둘러보는 일이 종종 있었지만 요즘에는 쉽게 되지 않는 일 중 하나다. 특히 최근에는 디지털카메라로 사진을 찍다보니 사진첩에 새로운 사진을 넣는 일도 없을 정도다.첫 번째 사진은 아내(윤정현)와 연애시절 용인으로 데
“안되면 되게하라”내가 소속했던 부대의 신조다. 기웃기웃 사진첩을 들춰보니 번뜩 떠오른 단어다. 당시를 회상하면 절로 미소가 흐른다.벌써 이정도 시간이 흐른 것 같지 않지만 사진 속의 나와 지금의 나는 너무도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린 것 같아 씁쓸하다. 하지만 젊은 시절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바로 ‘마음&rsq
당진시대로부터 취재 연락은 내게 반가운 소식이었다. 2004년도 사라져 가는 전통문화인 꽃상여(본지 499호 2004년 1월18일자 참조)를 만드는 일로 취재를 한 이후 내 추억이 남아있는 사진을 신문을 통해 소개한다니 가슴이 뛰었다. 당진시대에 소개할 사진을 찾는 일도 쉽지는 않았다. 오래된 사진부터 최근의 사진들까지 들춰보니 옛날 생각이 많이 난다. 첫 번째 사진은 군복무시절 카투사로 활동하던 당시의 사진이다. 카투사로 군 복무한 것을 하나의 자부심을 갖고 있는 내가 꼭 소개하고 싶은 사진 중 하나다. 입대 당시 나는 요즘 젊은
고이 모셔두기만 했던 사진첩을 오랜만에 꺼내 차분히 뒤적이다 보니 그동안 잊고만 지낸 줄 알았던 추억이 새롭게 떠올랐다. 낡은 사진첩 속 사진 만큼이나 세월이 흘러 뒤돌아보니 다시 한 번 과거를 돌아 볼 수 있는 기회가 됐다.혈기 왕성하던 시절이 항상 지속될 줄만 알았지만 이제는 마음만 20대인 모양이다. 신평라이온스클럽 회장을 지냈고 현재 신평농협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첫 번째 사진은 유년시절 막내고모(이보영)와 나(사진 좌측), 둘째 동생인 이창휘(사진 중앙), 막내 동생인 이승휘(사진 우측)와 함께 찍은 사진이다. 장남이었던
나는 정미면 천의리에서 태어나 줄곧 당진에서 생활했다. 학교 졸업 후 20년 넘게 이발관을 운영했다. 정미에서 처음 일을 시작해 군대를 다녀온 후 당진(고려이용원)과 합덕(아리랑이용원)에서도 이발관을 운영하다 지금 살고 있는 대호지에서도 마을이용원을 운영했었다. 대호지에 간척지가 조성된 이후 시작한 농사 일을 지금까지 해오고 있다. 첫 번째 사진은 15살 때 우리 마을에 있던 천의사진관에서 졸업을 기념해 찍은 사진이다. 남들은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14살인데 나는 9살에 학교에 입학해 졸업이 1년 늦었다. 사진에서처럼 당시 사진관에는
나는 당진시 사기소동이 고향인 당진의 토박이이다. 학교 졸업 후 1970년에 공무원 생활을 시작해 2005년 퇴직할 때까지 35년간 당진시에서 일했다. 첫 번째 사진은 결혼식 다음날 찍은 사진이다. 나의 왼쪽에 서 있는 분이 어머님이고 아내와 나 사이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서 계신다. 사진을 찍은 날이 1975년 11월23일인데 그날 첫눈이 내렸다. 첫눈이 오면 잘 산다고 하는데 그래서 우리 부부가 지금까지 잘 살고 있는 모양이다. 세 아이를 잘 키워 준 아내에게는 항상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다. 어버지를 3살 때 여의고 어머니와 조
아버지(고 이만국)는 송학리 내동 마을농악단의 상쇠였다. 아버지에게 농악을 배우다 1990년대 초 당진농악대에 입문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이병윤, 이석주, 노종선 씨에게 쇠를 배우고 각 읍면 쇠잡이들에게서 가락을 다듬었다. 2005년 당진농악대 상쇠를 맡아 단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당진 전통농악의 뿌리를 지키고 계승하는데 남은 생을 바칠 생각이다. 현재 젊은 세대는 전통 문화에 대한 관심이 적다. 당진농악대에서 가장 젊은 층이 40대일 정도다. 전통의 계승을 위해서 수년간 연구를 통해 모은 농악 관련 자료를 엮어 책을 만들고
목회 생활을 시작한 지 어느덧 30년이 넘었다. 고등학교 2학년 시절 교회 부흥회에서 목회자의 길을 가기로 결심한 후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20대 후반에 충북의 동낙교회에서 선교 활동을 시작했다. 꿈꾸던 일을 한다는 것은 참 행복한 일이었다. 생활은 넉넉하지 못해도 마음만은 풍요로웠다. 이후 광주와 군산에서 목회 생활을 하다 2006년에 당진 면천교회로 오게 됐다. 면천교회는 충남 최초로 생긴 교회로 역사와 전통이 깊은 곳이다. 1895년 설립 후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첫 번째 사진은 면천교회 초대 목사님의 모습이
6.25전쟁이 발발한 지도 벌써 60년이 넘었다. 긴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우리는 분단된 조국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전쟁도 현재 진행형이다. 지난해 일어난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포격 사건이 우리의 현실을 잘 보여준다. 6.25전쟁 당시 참전용사들은 다들 80살이 넘는 백발의 노인이 되었다. 하지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무공수훈자들이 받는 것은 훈장영예금 18만원이 전부다.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미망인이나 유자녀들은 이마저도 받지 못한다. 돈을 벌고자 전쟁터에 나선 것은 아니지만 국가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에 대해 제대로 된 예우가
올해가 2011년이니 농악을 시작한 지 거의 5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어린 시절에는 흥겨운 농악 소리에 끌려 무작정 따라하던 수준이었다. 그러다 이명환 씨가 상쇠로 있는 기지시농악대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농악을 배울 수 있었다. 이후로는 농악이 삶의 일부로 녹아들어 지금까지 채를 놓지 않고 있다. 내년이면 74살이 되는데 나이에 비해 젊어 보이는 비결도 바로 농악에 있다. 흥겨운 리듬에 몸을 맡기면 몸과 마음이 절로 젊어지는 듯하다. 첫 번째 사진은 약 24년 전 당진농악대를 창설하고 기념으로 찍은 사진이다. 회원들이 모여 합덕
송악 석포리에서 태어나 지금껏 살고 있어 농촌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다고 자부한다. 오랜기간 농촌에서 생활하기도 했고 작년까지 4년 동안 이장 직을 역임하면서 농가의 어려움도 잘 알고 있다. 지난 22일 국회에 기습 상정돼 한나라당이 단독 처리한 한미 FTA로 인해 농업 분야 피해가 불 보듯 뻔한 상황이다. 저가의 농·축산물이 시장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