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한평생을 한마디로 압축하라고 한다면 ‘고향’과 ‘농사’로 표현하고 싶다. 신평면 신당리에서 농사를 지으며 지금까지 살아왔으며 새마을지도자를 비롯한 각종 사회활동 또한 나의 삶의 한 축이다.첫 번째 사진은 내 나이 24살 때 결혼식 모습이다. 군대에 있을 때 결혼한 나를 축하해주기 위해 부대에서 5명의 ‘대표단’(?)이 왔었다. 신식 결혼식이 한참 붐을 타던 시절이었는데 나는 할아버님께서 손자에게는 최고의 식이 되어야 한다고 하셔서 전통혼례식을 올렸다. 할아버님 덕분에 이렇게 소중한 사진을 갖게 됐다. 두 번째 사진은 아내(이승예
유년기에, 그 보다 더 상장한 청년기에 자신만의 꿈을 향해 도전하는 젊음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 남들이 보기에 하찮은 것일지라도 나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꿈이요, 이상일 수 있다. 그게 무슨 돈이 되냐, 밥이 되냐 할지 몰라도 먼 훗날 가슴속에 잔잔하게 남아있는 추억은 억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소중한 기억이다. 첫 번째 사진은 31년전 아내(최은식, 55)와 결혼식을 올릴 때 모습이다. 지금은 없어져 버린 행복예식장에서 올린 결혼식이었다. 지금도 연락을 주고받는 친구들의 모습을 다시 보니 정말 새롭다. 당시에는 행복예식장에서 대부
추억은 곱씹어볼수록 새롭다. 오랫동안 찍어 모아놓은 사진첩을 들여다보면 지나간 세월에 때론 웃음이 나기도 하고 감회에 젖어버리기도 한다. 백석리에서 나고 자라서 지금까지 고향을 지키고 있다. 올해로 환갑을 맞은 나이지만 아직도 고향을 지키는데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 사진을 알아보는 사람이 당진에 많으리라 생각한다. 예산농업고등전문학교(이하 예산농전) 1회 졸업생인 나는 당시 고향을 지켜야 한다는 마음을 갖고 예산농전 원예과에 진학했다. 그러다 지금의 아내(이월자, 58)를 만나 살고 있다. 졸업사진의 배경이 예산농전의
아내(이연숙, 51)와 같이 집안에 있는 사진들을 뒤져보았다. 아내와 함께 찍은 사진, 농업단체장으로 활동하면서 찍은 사진, 아이들 사진, 지금의 목장을 지으며 남긴 사진들. 첫 번째 사진은 공군에서 헌병으로 근무했던 시절 찍은 사진이다. 나는 오류동에 있는 6546부대의 헌병대로 근무했었는데 지금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드셌던 헌병대 군기다. 군대 규율부였던 헌병대이기 때문에 다른 부대에 비해 군기가 매우 엄했었다. 덕분에 종종 순찰을 다니며 휴가 나온 장병들을 불러세우고 휴가증 검사나 얼차려 등을 주기도 했었다. 두 번째 사진은
자식이 훌륭히 성장해주는 것만큼 부모의 마음을 뿌듯하게 해주는 일이 있을까? 늘 일하느라 바쁜 우리 부부의 두 아들이 모두 훌륭하게 성장해줘 지금 내 마음을 무척 뿌듯하게 해주고 있다. 첫 번째 사진은 지난 2005년 서울대학교 컴퓨터공학과에 합격한 둘째 아들(민기, 22)의 입학식 때 서울대학교 정문에서 찍은 사진이다. 맞벌이 부부 사이에서 훌륭하게 자라준 아들이 고맙고 또 자랑스럽다. 게다가 입학 후에는 장학금을 받으며 학교생활을 하고 있어 우리 부부의 짐도 덜어주고 있다. 컴퓨터 프로그래머의 꿈을 갖고 있는 둘째는 서울에서 자
세상에는 세월의 흐름에 따라 몰라보게 변하는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수십년의 세월은 내 모습도, 마을과 고장의 모습도 변하게 만들었다. 시간에 따라 점차 바뀌어 가는 내 모습을 보노라면 아쉬움과 서글픔이 교차하기도 한다. 반면 좀처럼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 소중한 사람들과의 아름다운 추억과 우정이다. 첫 번째 사진은 연도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데 1980년대 초반이 아닐까 한다. 왼쪽에서 세 번째 인물이 김현욱 전 국회의원인데 김현욱 국회의원의 부인인 김혜선씨와 내 아내의 친분 덕분에 한진에 오셨을 때 찍은 사진이다.
추억은 곱씹어볼수록 새롭다. 오랫동안 찍어 모아놓은 사진첩을 들여다보면 지나간 세월에 때론 웃음이 나기도 하고 감회에 젖어버리기도 한다. 오래된 일이라 기억이 나지 않는 일도 많다. 그때의 기억을 더듬기 위해 사진을 찾아봐도 기억이 나지 않는 일도 있다. 좋은 일이든, 안 좋은 일이든 추억은 더듬을수록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 같다. 첫 번째 사진은 1984년 군 생활 시절 미군 친구들과 찍은 사진이다. 공부를 잘했던 나는 대학에 합격했지만 돈이 없어 군대에 먼저 가야했다. 지금이야 말문이 막혀버렸지만 저 당시에는 영어도 술술 나오
사진 속에 깃든 추억은 나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까지 웃음짓게 만든다. 아이들과 함께한 모습, 지금은 연락조차 되지 않는 먼 옛날의 절친한 친구들... 사진 속에서 이들을 찾았을 때 다시 한번 과거로 돌아가게 된다. 첫 번째 사진은 초등학교 재학 시절 모습이다. 합덕초등학교를 다니다 아버지를 따라 잠시 홍성의 남당리로 전학을 갔을 때 찍은 사진이다. 학교의 모습이 지금 보니 매우 낯설다. 앉아있는 줄에서 왼쪽의 두 번째가 나다. 뒤에 서 있는 분이 담임선생님이었다. 잠시 동안 인연을 맺은 친구들이었는데 지금은 연락이 잘 되지 않고
그동안 내 모습을 많이 찍어놓고도 열어보지 못한 사진이 많았었는데 내 젊은 시절 모습을 다시 보니 감회가 새롭다. 고대면 성산리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살아왔는데 사진들을 다시 보며 내 지난 삶들을 정리하게 됐다. 첫 번째 사진은 젊었을 적 모습이다. 아마 누가 봐도 나라는 것을 알 수 있을만큼 지금 모습의 흔적이 짙게 남아있다. 정확한 연도가 기억이 나지 않
20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결혼하고 두 아들을 낳은 뒤 얼마 전에 첫 손자를 봤다. 그동안 마을 일을 헌신적으로 해왔다고 생각하니 지나온 삶이 보람되기도 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가족들과 함께 한 사진이 많은 것. 늘 내 옆에 가족들이 있어서 지금까지 지역사회에 대한 봉사를 해올 수 있었던 것 같다. 첫 번째 사진은 내가 20살 이전에 서울에서 일하고 있을
50대에 들어서면서 그동안 살아온 삶의 모습들을 돌이켜보았다. 아내(최순례, 49)와 함께 한 26년간은 숨 돌릴 틈없이 열심히 살아온 세월들이었지만 자녀들이 장성하고 어느 정도 안정을 이룬 지금은 특별한 목표보단 그동안 소홀했던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다. 특히 증조할아버지때부터 5대째 살아온 구룡리인데 마을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무엇이든 하
오래된 사진들을 들춰보며 오랜만에 흐뭇함을 느꼈다. 그런데 언제였는지, 어디였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다. 너무나 바쁘게 살아온 듯하다. 첫 번째 사진은 연도도 잘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된 것 같다. 30여년 정도 된 사진인 듯한데 왼쪽에 서있는 키 큰 사람이 나다. 정은당은 지금의 당진읍 녹지원 꽃집이 있던 자리 부근인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은 없어졌
11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등산을 다녔다. 1996년 가족들과 함께 산에 오른 것이 계기가 돼 지금까지 산에 다니고 있는데 지금은 합덕산악회의 회장과 주민산악회의 산악대장을 함께 맡은 ‘산사나이’가 되어 버렸다. 첫 번째 사진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 처음 보는 사람들은 쌍둥이라고 할지 모르는데 둘 다 내 모습이다. 내가 중학교 2학년이니까 1956년쯤인
아내(김선녀, 48)와 함께 한 지난 27년간은 만족스럽고 뿌듯했다. 가정에 충실하고 아이들을 훌륭히 키워주고 부모님도 잘 모셔준 아내. 첫번째 사진은 아내와 결혼식을 올린 직후 집 뒷마당에서 찍은 사진이다. 아내와는 1981년에 결혼했는데 그 사연이 좀 특이하다. 군 제대 후 도시로 나가기 위해 잠시 마을에서 꽤 큰 규모의 농장이었던 구지농장에서 일한 적
사진을 들춰보며 추억을 회상하기에는 아직 나이가 이른 것 같아 마냥 쑥스럽다. 바로 얼마 전까지 내 모습이었던 같은데 사진 속의 나와 현재의 나는 많이 다른 것 같다.첫 번째 사진은 어떻게, 누구와 왜 갔는지 지금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뒤에 물개 동상을 보니 삽교천에 친척들과 갔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갈색 재킷을 입고 두 주먹을 불끈 쥔 아이가 나다
농업과 어업이 공존하는 장고항 마을은 전형적인 어촌마을로 지형이 장고 모양으로 생겼다고 해 장고항이라고 불렸다. 그동안 장고항은 시대와 함께 많은 변화를 겪어왔다. 1970년대 새마을사업과 함께 실치잡이가 시작되어 지금은 이 실치가 장고항의 특산물로 자리잡았다. 그 당시 ‘멍텅구리배’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큰 배들은 정부의 구조조정 시책으로 인해 거의 사라지
참 열심히 살아온 세월이었다. 돌이켜 보면 할 말이 많은 삶이었다. 그러나 후회스러운 삶을 살아오진 않았다고 자부한다. 주변에 좋은 친구들이 있고 나는 믿어주는 이들이 있고 나의 가족들이 있으니까. 지금은 오래 전부터 해오던 피자전문점을 접고 3년 전부터 저렴한 가격의 횟집인 ‘바다이야기’를 운영하고 있다. 첫 번째 사진은 1976년 서울 쌍문동의 하숙집에
참으로 오랜만에 옛날 사진첩을 들춰봤다. 30여년만인가. 나의 추억을 신문에 싣고 싶다는 연락을 받고 사진첩을 찾아봤는데 다시 한번 그 시절을 회상했다. 찾아온 사람을 보내고도 한참 동안 사진첩을 들여다봤다. 거기엔 그리운 얼굴들과 함께 나의 지나온 삶이 담겨 있었다. 첫 번째 사진은 고등학교의 ‘꽃’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예산이 고향인 나는 1978년
노래를 너무 하고 싶었던 난지도의 초등학생이 인천의 중학교에서 노래를 잠시 잊었다가 다시 한번 노래에 대한 열정을 깨닫고 예술고등학교로 진학한 뒤 중앙대 성악과를 졸업했다. 그 후 성악가와 지휘자로서 나름대로의 성공을 거둔 후 고향으로 돌아왔다. 영화같다고 할 수도 있는 나의 삶이지만 내가 원하는 삶을 후회없이 살아왔다고 말하고 싶다. 첫 번째 사진은 계원
나의 삶은 운동과 뗄 수 없다. 육상 특기생으로 고교를 진학해 한때 유망주라는 평가를 받았던 나였다. 그 후 전문적인 운동선수로 성장하진 못했지만 고교 때부터 해온 달리기는 나를 ‘강인’한 사람으로 만들어줬다. 지금도 당진마라톤클럽에서 활동하며 주요 마라톤대회에 참가해 좋은 성적을 내고 있다. 첫 번째 사진은 군생활을 할 때 찍은 사진이다. 나는 육군본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