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년간의 공직생활은 수많은 역사와 에피소드의 연속이었다. 교육청에서 일할 땐 한일회담 반대시위로 학교가 휴교를 하여 일주일간 인생에 없던 유랑을 하기도 했고 극심한 가뭄으로 호미로 땅을 파서 모를 심었던 기억, 낮은 수매가로 추곡수매에 응하지 않는 농민들을 설득하기 위해 주야로 농가를 방문했던 기억 등등.. 나에게 공직생활은 비록 춥고 배고팠지만 보람으로 산 세월이었다. 그러기에 나는 두 아들(희승, 희상)이 공직자가 되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다. 여기에 내놓는 세 장의 사진엔 지난 공직생활의 애환과 감동이 그대로 녹아들어 있다.첫
내 아내 박용자는 8남매 집안의 장남인 나에게 시집을 와 숱한 고생을 했다. 시집올 당시 동생 일곱에 부모님, 할머님, 오갈 데 없던 사촌까지 열세식구가 한 집에 살았으니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하루하루가 얼마나 고단했을지 상상할 수 있으리라. 게다가 어머님은 마흔아홉에 혈압으로 쓰러져 그 후 11년을 앓으시다 예순을 못 넘기시고 돌아가셨다. 아버님도 예순을 넘기지 못하셨다. 그러는 바람에 아내는 일곱 동생의 뒷바라지를 맡아서 해야 했다. 막내동생과 나와의 나이 차가 25년이니 자식 같은 시동생들을 줄줄이 건사했던 것이다. 첫 번째
목회자의 길을 걸어 온 30여년의 세월 중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은 교인들과 함께 새 성전을 짓겠다는 다짐을 하고 서른 평도 안되는, 겨울엔 무지 춥고 여름엔 무지 더웠던 그 곳, 한정교회(신평면 한정리, 은수교회의 전신)에서 목회를 할 때였다. 한정교회의 터는 교회소유가 아닌 사유지여서 교회를 새로 지어 이사를 가야할 상황이었다. 새 성전을 지을 자금을 마
첫 번째 사진은 1958년 2월28일 당진정보고 졸업기념으로 군청 정원에서 친구 박진순과 찍은 것이다. 우리는 고교 동기동창으로 당진농고에서 당진상고로 학교명이 개명된 후 첫 졸업생이었다. 졸업식이 끝난 후 헤어지기 아쉬웠던 나와 친구들은 시내 곳곳을 다니며 사진을 찍었다.지금은 주차장으로 바뀌었지만 당시 군청의 정원은 여러 가지 나무와 화초로 잘 꾸며져 군내에서도 아름다운 정원으로 이름이 높았다. 사진에서 보이는 가운데 석재 조형물은 국기게양대이다. 지금의 시멘트로 된 국기게양대에 비해 좀더 운치가 있어 보인다. 뒤에 보이는 나무
첫 번째 사진은 1970년 당진초등학교 5학년에 재학중일 때 학교 친구들과 함께 제7안식일 교회 앞에서 찍은 것이다. 제7안식일 교회는 당진감리교회와 당진장로교회 중간쯤에 위치했었는데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지금은 이름이 기억나지 않지만 앞줄 가운데의 친구가 전학을 가게 되면서 찍게 된 것 같다. 교회 앞에서 찍은 사진이니 독실한 신자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사진 찍을 장소를 고르다 선택하다 보니 이곳까지 오게 됐다. 두 번째 줄 가운데가 나다. 이 친구들은 읍내에 살던 아이들로 곧잘 어울려 지냈다. 학교에서는 여학생들 노
청년기엔 누구나 가슴에 뜨거운 열정을 지니기 마련이다. 그 열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많은 청년들이 지역사회의 전면에 나서서 새로운 길을 열어가고 있다. 도시화가 덜 진행된 지역일수록 청년들의 발언력이 높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청년들의 조직과 단체가 그래서 중요하다. 당진청년회의소는 30년이 넘는 전통 속에서 청년들의 열정과 꿈을 담아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첫 번째 사진은 1971년 7월3일 당진청년회의소가 창립총회를 갖고 공식적인 출범을 선언하는 모습이다. 당진청년회의소는 당시 온양청년회의소의 한 회원의 제안으로 당진에서 활동하고
짧은 인생에서 다양한 사회경험은 삶을 좀더 풍요롭게 하는 것 같다.여러 우여곡절로 인해 직업도 몇 번 바꾸고 어렵고 힘든 시기도 수 차례 겪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모두 좋은 경험이 됐다. 다양한 직업과 함께 각종 사회단체, 교회, 정당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활동을 펼치면서 사회에 대한 좀더 깊이 있는 사고와 인식을 갖게 됐다고 자부한다. 수많은 시행착오와 오류를 겪으면서 나는 자신을 한 차원 성숙시킬 수 있었다.첫 번째 사진은 1978년 충남 성환의 육군 32사단 3관구사령부 22중대 중대본부에서 반장으로 근무할 때의 모습이다. 탄약
어렸을 적 멋진 방화복에 빨간 소방차를 타고 출동해서 불을 끄는 소방관을 누구나 한번쯤은 꿈꿔 봤을 것이다.그 꿈을 이룬 당진소방서의 소방관들은 긍지를 갖고 주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특히 소방인력이 절대 부족한 상황에서 지역주민들로 구성된 의용소방대와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시급한 순간에 대처하고 있다.첫 번째 사진은 1993년 11월6일 소방의 날 행사준비를 위해 예행연습을 할 때의 모습이다. 예행연습이라고 해도 의용소방대원 수십명이 일제히 소방호스로 물을 내뿜는 모습은 언제 보더라도 장관이다.
한동안 캥거루 족이라는 말이 세간에서 화제가 됐듯이 실제로 요즘 젊은이들은 성인이 된 후에도 사회에 진출하기를 두려워하고 부모에게 의지하려는 경향이 강한 것 같다.이와는 달리 우리 나이 때의 동년배들이 일찍 직장생활을 시작해 어린 나이 때부터 다양한 사회경험을 쌓았다. 그러한 경험들이 지금 내 삶에 큰 힘이 되어주고 있다.중학교를 졸업한 후 인천에서 아버지의 일을 도와 점포를 운영하며 처음으로 직장생활을 할 무렵의 모습이다. 평일에 열심히 일하고 난 후 고향(고대면 성산리) 친구인 박정길(오른쪽)과 야유회를 가서 포즈를 취했다. 이
푸른색 군복으로 상징되는 군 생활은 그 전과는 색다른 새로운 생활과 경험을 맛보게 한다. 물론 평생 잊지 못할 고통스런 기억도 있지만 술자리에서 좋은 안주거리로 삼을 만한 재미있는 일도 많다. 특히 20대 초반 열혈 청년기를 군대에서 보낸 중년들에게는 소중한 추억이 된다. 그 한때를 잊지 못하고 당진군재향군인회의 회원들은 오늘도 아련한 청년기를 추억하고 있
여행은 일상에서 탈출해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게 해준다. 또한 책에서는 배울 수 없는 흥미진진한 세상을 직접 몸으로 접할 수 있게 해주기도 한다. 이 같은 이유로 젊어서부터 여행을 좋아했다. 힘들고 어려운 일에 닥쳤을 때 모든 것을 훌훌 벗어버리고 떠난 여행길에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삶의 원동력을 발견하기도 했다. 여행에 대한 기억은 지금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삶의 활력으로 작용한다.첫 번째 사진은 예산의 수덕사로 친구들과 놀러갔을 때 만공탑 앞에서 찍은 사진이다. 아직 결혼하기 전이었으니까 80년대 초반으로 기억한다. 당시
인생의 뒤안길에서 들여다 본 사진첩은 과거 소중했던 순간의 기억을 그대로 담고 있기에 소중하다. 덧없는게 인생이라고들 하지만 한 장 한 장의 사진들이 모여 한 사람의 파란만장한 역사가 된다. 모두들 그렇겠지만 어렵고 힘들던 시기에 태어나 세파를 이기고 한 사람의 사회인으로 성장하기까지 나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적지 않은 시련이 있었지만 교직에 몸담으며 평생을 바친 내 지난 삶에 대해 한번도 후회하지 않는다. 어엿한 사회인으로 훌륭하게 성장한 제자들을 바라보는 즐거움이란 다른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보람이기 때문
우강면은 1942년 10월1일 일제의 지방행정구역 명칭변경에 의해 과거 범천면에서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조선시대의 범근내포의 범근내에서 유래된 범천면은 당초에는 면천군에 소속돼 있었으나 1914년 군면 통폐합으로 당진군에 편입됐다. 우강이라는 명칭은 우평과 강문, 즉 소들강문에서 한자씩 따서 지었다.우강면의 지형은 구릉성 야산지대인 동부지역을 제외한 서부지역의 대부분이 간석지를 막아서 만든 평야지대이다. 국가 차원의 대규모 간척사업을 진행하는 요즘과는 달리 과거에는 자연 마을단위로 공동작업을 통해 간석지를 개간했다. 첫번째 사
송악면 부곡리에 있는 필경사는 농촌계몽 문학의 선구자였던 심훈선생이 1935년 소설 상록수를 탄생시킨 곳이다. 그리고 송악면 부곡리는 심훈의 할아버지가 살던 곳이며 심훈의 장조카인 심재영씨(95년 작고)가 살던 곳이기도 하다. 심재영씨는 상록수의 주인공 박동혁의 실제모델이며 상록수에 등장하는 공동경작회 또한 심재영씨가 조직한 농촌계몽 운동 조직이었다. 지금도 부곡리엔 필경사와 더불어 심재영씨의 생가가 남아있어 이들 일가의 일대기와 상록수의 역사를 전해주고 있다. 첫번째 사진은 1937년 6월28일에 촬영한 부곡리 공동경작회의 모습이
대건노인대학이 문을 연지 올해로 벌써 15주년이 되었다. 1주일에 불과 두시간 남짓, 100여명의 노인들이 모여 교양 강좌를 듣고 레크리에이션을 즐기지만 이 시간만큼은 우리 노인들이 세상의 중심이고 인생의 주인이다. 노인대학을 시작한 것은 보통 노인들, 즉, 가진 것 없고 배움도 부족한 농촌노인들에게 아주 조금이나마 지식과 교양의 맛을 보게 하고 노년의 시
‘남의 가게 앞에 왜 차를 대!’ 억센 경상도 억양의 한 노파의 호통이 귀가 따가울 정도로 거세다. ‘합덕에서 장사를 제일 오랫동안 하신 분들이라 해서 사연을 듣고자 찾아왔다’고 했더니 할머니는 그제서야 화가 풀리신 모양으로 가게안으로 안내를 하신다. 순간, 시간은 60년전으로 흘러 1950년대 잡화점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진다. 나무로 짠 진열장들과 역시
김태수 한국일보 합덕지국장지금으로부터 40여년 전인 1963년도, 한국일보 합덕지국장을 운영하던 김태수씨(사진)와 사진기사 현은재씨(작고, 중앙사진관 현종환씨의 당숙)가 의기투합했다. ‘합덕이 하루가 다르게 변모해 지금 모습이 금방 사라질지도 모르니 기록으로 남겨두자’고 마음을 먹고 두 달이상 합덕 곳곳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은 것이다. 주요 기관들의 모습
버그네의 과거‘버그네 장’으로 불린 합덕 5일장은 농촌경제가 성황을 이뤘던 80년대까지만 해도 내포지역에서 가장 큰 시장이었다. 지금은 농촌경제의 쇠락으로 5일장은 물론 합덕시가지의 경기도 장기간 침체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석장의 사진을 통해 옛 합덕시가의 모습을 잠시 회상해 보기로 한다.첫번째 사진은 지금으로부터 70여년전 합덕시가지의 모습이다. 알아보기 힘들 정도지만 왼쪽에 초가지붕의 상가와 오른쪽엔 판자집에 일본어로 쓰인 듯한 간판이 보인다. 초가지붕의 상가 바로 앞엔 나뭇짐이 보이고 가운데 거리엔 갓을 쓰고 두루마
나의 어머니 백채운 권사는 삼봉지역에 기독교를 전파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어머니는 주일날 예배만 마치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전도’를 했다. 그런 어머니 밑에서 자란 나 역시 어려서부터 성가대도 하고 커서는 주일학교 교사도 하는 등 교회활동에 열심이었다. 첫번째 사진은 삼봉교회에서 성가대 활동을 할 당시였던 1965년도 여름. 배미산(현 아미산)에서 열렸
송악산1988년 봄, 송악면 중흥리쪽에서 찍은 송악산의 모습이다. 쟁기질하는 농부의 모습과 못자리, 밥풀꽃, 멀리 미류나무의 모습 뒤로 완만히 솟아 있는 송악산이 전형적인 농촌풍경과 어우러져 푸근하다. 이처럼 인공적인 시설물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던 송악산엔 지금 정상에 통신사의 기지국과 철탑이 세워져 있고 산중턱을 가르며 임도가 나 있다. 울창했던 소나무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