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번째 사진은 큰동서(두 번째, 안영수)와 처남(세 번째 한이주)과 함께 당시 서산이었던 승현면 신당리의 징검다리를 건너는 모습이다. 조심하지 않으면 자칫 물에 빠질 수 있어, 기우뚱 하다 카메라에 잡혔다. 빛이 바래 사진으로는 느낄 수 없지만 맑은 물과 깨끗했던 주변이 인상에 남아있다. 두번째 사진과 세번째 사진은 늦은 나이에 여행을 하면서 찍은 사진들이
앨범을 펼치고 반가운 사진들을 접할 때면 문득 느껴지는 것들이 있다. 내가 사진 속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갈 때 머릿속으로 했던 생각들이 바로 그것이다. 머릿속에 떠올렸던 많은 생각과 세상에 대한 꿈들 중엔 사랑하는 아내(장은섭, 74)에게도 그리고 자식들에게도 미처 말하지 못한 내용도 있다. 지금은 대부분 간소하게 지나가는 환갑 잔치! 첫 번째 사진은 바로
그동안 바쁘게 살아오느라 미처 정리하지 못했던 사진들이 어느새 앨범에 다 들어가지 못 할 정도로 수북이 쌓여 있다. 언제라고 꼬집어 말할 수는 없어도 사진 속에 있었던 일들은 머릿속에 또렷이 남아 있다. 첫번째 사진은 1974년 남편(장남순, 66) 회사에서 2박3일로 여행을 갔을 때 찍은 것이다. 그때는 넷째 임신 9개월째였는데도 배 아픈 줄 모르고 즐겁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을 하고 싶었던 시절 무성한 가시밭길을 혼자 해쳐나가는 일이 때론 힘들기도 했다. 하지만 앨범 속 내 모습은 당당하고 자랑스러워 보인다. 지금 내가 재배하는 버섯들 처럼... 첫번째 사진은 17살 때 동네 친구들과 함께 모여서 찍은 사진이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60년대였던 그 당시 고대중학교 옆자리에 사진관이 있었다. 앞줄 맨 왼쪽엔 앉
5권의 앨범 속에는 31년 동안 군 생활을 하면서 겪었던 나의 추억들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다. 힘들고 고된 훈련 속에서도 즐거웠던 일과 웃지 못할 일들이 사진첩 안에는 그대로 살아 있었다. 첫번째 사진은 1978년 부중대장이었을 때다. 낮에는 자고 밤에 걷는 천리행군 중에 잡은 뱀으로 기념촬영을 한 뒤 끓여 먹었는데 뱀은 맛 좋은 영양간식이었다. 천리행군
생활이 바빠 어디에 있었는지 알지 못했던 옛 사진들. 책장을 넘길 때마다 40여년의 시간을 말해주듯 누렇게 변해버린 앨범은 내가 미처 기억하지도 못했던 모습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첫번째 사진은 1967년 삼봉교회 교인들과 난지도 해수욕장에 갔을 때의 모습이다. 난지도 해수욕장이 처음 개장했을 때인데 그 당시 난지도 물은 무척 깨끗했다. 또 모래도 많았다. 무엇보다 다홍색으로 물든 해당화가 해변 숲에 가득했었다. 나는 왼쪽 끝에 서있고 맨 오른쪽 끝에 앉아 있는 사람은 전 석문면 개발위원장인 황규영(대호농약사 대표)이다. 두번째
앨범 속 사진 밑에 “잡아봤자 개폼이지 뭐”, “촌사나이 멋져”라고 써있는 단 한 줄의 문장들은 옛날 내 모습을 곧잘 설명한다.첫번째 사진은 1981년 모내기 후 친구, 동네형과 함께 예당저수지로 밤낚시를 하러갔을 때다. 고등학교 때 어머니께 졸라서 산 카세트로 ‘YMCA’, ‘we are the champion’을 들으며 큰 병들이 소주에 낚시로 잡은 붕
40년 된 낡은 앨범 속에 아기자기하게 꼽혀있는 흑백사진들은 비교적 나의 과거를 잘 말해주고 있었다. 비 오는 날 시간이 생기면 종종 앨범을 들여다 본다. 언제나 그러하듯 추억들은 항상 소중하게 느껴진다. 첫번째 사진은 1969년 21살 때 공수부대에서 낙하훈련을 받을 당시의 사진이다. 낙하산을 착용하고 비행기를 타기 전 모습인데 공포감으로 얼굴이 굳어 있다. 낙하훈련은 김포 비행장 근처로 314m 정도 되는 높이에서 이뤄졌다. 착지지점은 행주나루. 떨어지기 전 공포감과 긴장감은 컸지만 1분30초 동안 새가 되어 하늘을 나는 그 쾌
사진찍는 것을 싫어해 좋은 사진이 그리 많지 않아 망설이는 마음으로 앨범을 열었다. 하지만 부끄럽다고 생각되던 옛 모습들이 보기만 해도 미소짓게 하는 작은 행복으로 다가왔다. 첫번째 사진은 1981년 2월12일(음)에 친정집인 신흥리에서 중매로 만난 남편(박헌교, 52)과 결혼식을 마친 뒤 신혼여행을 떠나기 전 모습이다. 남편 친구인 이갑포(솔밭가든, 52)씨의 택시를 타고 설레는 마음으로 신혼여행을 갔던 기억이 난다. ‘당진’이라고 새겨진 포니택시는 80년대로 가는 타임머신이 아니었을까. 두번째 사진은 19년 전 한 여름에 집 마
초등학교(고대초) 4학년 때부터 축구를 시작해 45년이 지난 지금까지 축구와 함께 해온 하상준씨(55). 그동안 각 체육단체의 감사를 맡아 바쁘게 살아오면서 추억들을 되돌아 볼 기회가 없었다는 하상준씨는 어렵게 몇 장의 사진들을 꺼내 보였다. 운동만 하기 힘들었던 옛 시절, 단칸방에 살면서 축구에 대한 희망은 버리지 않았다. 운동 여건이 열악한 그 때 축구감독 겸 코치로 축구에 대한 열의를 북돋아 주셨던 초등학교 선생님(하헌강씨)이 떠오른다. 그리고 특별한 보양식이 없어 간식으로나마 날계란과 분유를 타 먹으며 운동했던 것이 아련히
아들과 함께, 한 해수욕장의 모래사장을 뛰었던 기억이 있다. 늦은 나이에 얻은 아들 이민우(13)가 막 걸음마를 뗐을 때의 일이다. 그날 아들과 해변에서 경주를 펼쳤지만 누가 이겼는지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다. 그저 아들의 작은 발걸음 하나하나가 신기하고 대단하게 느껴졌을 뿐이었다. 크고 작은 많은 사건들이 일생에서 일어나지만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것은 강한 인상을 남기는 몇 가지이다. 추억이 소중하다고 느껴지는 이유가 있다면 떠오르는 즐거웠던 기억들과 더불어 떠올릴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이 항상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
전기누전으로 인한 화재가 발생했고 겨우 목숨만 건질 수 있었던 때가 있었다. 화마(花馬)와 함께 사라진 추억들. 그 안에는 오렌지처럼 상큼했던 나의 여고시절도 들어있었다. 화마가 가져간 추억에 대한 아쉬움은 앨범을 넘기는 이 순간에도 타고 남은 재(滓)와 같은 흔적으로 남아있다. 이 나이쯤 되면 빛바랜 사진들이 수두룩할 만도 하건만 이러한 이유로 나의 앨범에는 빛바랜 사진이 별로 없다. 그러나 몇 장의 사진 없이도 꿈 많았고 순수했으며 아름다웠던 그 시절로 언제든 드나들 수 있다. 마음에 담긴 추억만큼은 화마도 가져갈 수 없었기 때
추억이 서려있는 사진들을 들추다 보면 그 속엔 없어도 생각나는 사람들이 있다. 이병천(57), 김종구(57), 이용식(57)... 사진에서 그들의 모습은 찾을 수 없지만 옛 사진을 볼 때면 나는 그들을 떠올린다. 옛모습이 담긴 나의 사진에는 보여지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떠올리게 하는 신비한 힘이 있다. 첫번째 사진은 군 복무를 하던 22살의 내 모습이다. 군대에서 서무계를 보는 바람에 공무원이 될까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고모의 말대로 장사를 시작했고 지금에 이르렀다. 젊은 시절 생각한 미래와 작금에서 뒤돌아 본 모습 사이에서 후
나는 사진을 간직하고 사진은 나의 추억과 옛 친구들과의 우정을 간직한다. 또 그 추억에는 때로 두 배의 고통이 서려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3살 때부터 소아마비로 거동이 불편했던 나는 항상 기우뚱하게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비록 똑바로 서지는 못했지만 세상을 기우뚱하게 보지 않기 위해 스스로 노력했던 기억이 새삼 밀려온다. 첫번째 사진은 탑동초등학교 운동회 날 어머니가 찍어주신 사진이다. 어머니는 운동회에 참여할 수 없었던 나에게 기념이라며 운동복을 입히신 후 사진을 찍어주셨다. 입고 있는 옷의 중앙에는 ‘탑동’이란
처음 경험하는 것은 추억으로도 쉽게 남는다. 첫 키스, 첫사랑. 나에게도 처음 경험하는 것들이 있었고 그들 대부분은 그리워하는 추억, 기억하고 싶은 시간으로 남았다. 누군가 잠시 잊었던 순간을 한 장의 사진을 통해 내미는 순간. 사진 속 내가 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사진은 데뷔작 영화 ‘물보라(감독 김수용)’의 한 장면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10대 때 사진 속 장소(욕지도, 경남 통영시 소재)에서 처음 영화를 찍었다. 내 몸을 감싼 파도의 느낌이 지금도 생생하다. 지금은 어떻게 변했는지 모르지만 그때는 정말 깨끗했다. 또
추억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를 설명하는 것도 참 재미가 있다. 때론 기억이 나지 않아 설명하기 어려운 것들도 있지만 반드시 기억할 필요는 없기 때문에 마음의 짐은 되지 않는다.추억을 나누기 위해 나는 시집와 당진에 살면서 한번도 공개한 적이 없는 사진 몇 장을 꺼내들었다. 나에게만 의미가 있을 사진일지라도 다른 사람에게 지난날을 연상할 수 있다면 그 또한 보람된 일이 아닐지...첫번째 사진은 6.25전쟁으로 학교가 전부 소실돼 임시로 지어진 막사에서 졸업하면서 찍었던 사진이다. 당진시내
내 손에 들려진 ‘추억’ 한 장은 처음 보는 낯선 젊은이 앞에서도 입가에 미소를 짓게 한다. 그것은 아마도 내 앞에 있는 현실보다 추억의 사진 속 현실이 더 가깝게 느껴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억 한 장이 갖는 힘은 믿어 볼만도 하다. 추억을 함께 하면 서먹함은 뒷전으로 밀려난다. 오랫동안 알고 지냈던 사람처럼 사람을 가깝게 만든다. 첫번째 사진은 20여
삶이 바쁘다 보면 덩달아 바쁜 것이 추억인가! 지난 모습이 담긴 사진을 오랜만에 꺼낸다. 바쁜 것은 추억도 마찬가지였건만 변한 것은 나 혼자일 뿐, 사진 속에 ‘나’는 변함이 없다. 내가 슬플 때도 기쁠 때도 사진 속에 난, 웃는 모습이면 항상 웃었고 무표정일 때는 무표정 그대로였다. 그래서 추억 속엔 ‘난’ ‘나의 변함없는 그림자’라는 생각도 든다. 첫번
빛바랜 사진 한 장으로도 기분이 좋아질 수 있는 것은 사진속에 담겨 있는 그 순간이 내가 이루고자 했던 것과 가장 가까운 모습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때론 삶이 꿈으로부터 나를 멀어지게 하지만 그 고삐를 쥐고 있는 것은 나라는 사실을 이제는 알 것 같다. 첫번째 사진은 면천중학교 재학시절 동요작곡가 서동석 선생님과 도내 음악콩쿠르에서 중등부 작곡부분 특상을 받았을 때의 사진(앞줄 앉은 이)이다. 교복을 입은 남자는 1년 선배 이용관이고 여자는 오진희로 현재 성심여중 교사로 근무하고 있다. 아직도 접지 못한 작곡의 꿈은 이렇듯 사진에
순성면 나산리 함봉산자락에 사는 젊은 농부로, 축산인으로 살아오면서 추억을 만들어 내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 지금은 산업고로 변한 합덕농고를 열심히 다니면서 배운 농업기술을 기초로 살아오는 동안 즐거운 생각들이 있지만 빨리 떠오르는 추억은 많지 않다. 그래서 몇 장의 사진에 기대어 추억을 더듬어 본다 첫번째 사진은 합덕농고(24회) 3학년 시절 농악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