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사진은 아내(윤정현, 53)와 32년 전 약혼한 다음 찍은 사진이다. 약혼이라고 하기도 어려운 것이 당시 부모님들도 모른 상태에서 서로의 미래를 약속하고 사진을 찍었다. 당시 아내가 사진을 찍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아 사진이 많지 않은데 젊은 날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소중한 사진이다. 사진 속의 내 모습을 보고 잘생겼다고들 하는데 난 아내의 모습이 훨씬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 사진은 둘째 아들(남기석, 24)이 5살 때 대전 동학사에 가서 찍은 사진이다. 19년 전이니 1988년이다. 아쉬웠던 것이 큰 아들(남기
아내(이병희, 54)와 오랜만에 옛날 사진들을 뒤져봤다. 언제적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사진 속에서 내가 잃어버린 미소를 발견했다. 그리고 군대에서 찍은 사진, 딸들과 찍은 사진 등 추억이 깃들어 있는 사진들을 보며 잠시나마 흐뭇한 생각에 젖어 보았다. 첫 번째 사진은 척 봐도 알 듯이 군생활 때 찍은 사진이다. 1969년부터 강원도 철원의 3사단에서 하사관으로 군생활을 했었는데 행정반에서 상급부대와 통화하며 찍은 사진이다. 자세가 무척 ‘거만’한데 표정까지 ‘거만’한 것 같다. 젊었을 적 모습은 이 군생활 시절 찍은 사진들에 잘 나
첫 번째 사진은 대략 40여년 전 사진이다. 학교에서 4-H회 활동을 하던 친구, 선후배들과 ‘쌍천동 바닷가’에서 찍은 사진이다. 날짜도 기억이 안나는데 저 장소는 지금의 현대제철이 있는 장소로 사진찍는 장소의 뒤쪽의 바위가 할미바위다. 당시 4-H회는 어버이날과 어린이날 등 특별한 날마다 연극과 노래자랑 등을 준비해 마을 주민들을 위해 행사를 열었었다. 행사가 있을 때면 매일 집에 늦게 들어가기 일쑤였다. 두 번째 사진은 내가 22살 때 유곡초등학교에서 찍은 사진이다. 나는 유곡초 18회 졸업생이니 32년 됐다. 지금이야 나이들고
첫번째 사진은 척 봐도 알다시피 아내(임간난, 52)와 결혼식을 올리고 축하를 받고 있는 사진이다. 벌써 28년 전 사진인데 대호지 출신인 아내와는 부모님들의 중매로 만났다. 사진 속의 아내의 모습은 지금 우리 아이들에게서 찾을 수 있다. 거의 사라져가는 전통방식의 혼례를 치렀는데 아내는 뭐가 그리 부끄러운지 시종일관 고개를 들지 못했었고 아내를 얻은 나만 기뻐하는 것 같다. 두번째 사진은 말할 수 없이 소중한 사진이다. 내 나이 열일곱이나 열여덟에 찍은 사진이니 38년 정도 된 것 같다. 오토바이가 우리나라에 처음 모습을 보였을
사진 속에 깃든 추억은 나 뿐만아니라 다른 이들까지 웃음짓게 만든다. 철없던 시절의 치기어린 행동부터 내 인생의 가장 영광스런 순간까지.. 사진 한장이 주는 의미는 이만큼 크다. 첫 번째 사진 의 나이는 35살이다. 고등학교 2학년 재학 시절 단짝 친구 4명이 모여 전국 배낭여행을 가서 찍은 사진인데 사진에 나와있듯 부산에서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 찍은 사진
오래 된 일이라 기억이 나지 않는 일도 많다. 그때의 기억을 더듬기 위해 사진을 찾아봐도 기억이 나지 않는 일도 있다. 좋은 일이든, 안 좋은 일이든 추억은 더듬을수록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 같다. 첫 번째 사진은 1977년도로 기억한다. 송산초등학교 5학년에 재학 중일 때 송산면 봉화산으로 소풍을 갔을 때다. 김밥과 계란을 싸들고 소풍을 갔었는데 당시에는 소풍을 갈만한 곳이 마땅치 않아 소풍이라고 하면 늘 봉화산 아니면 당산리의 오도 부근이었다. 송산초등학교 52회 졸업생인 나를 따라서인지 내 아이들 모두 송산초등학교를 졸업했거
추억은 곱씹어볼수록 새롭다. 오랫동안 찍어 모아놓은 사진첩을 들여다보면 지나간 세월이 때론 웃음이 나기도 하고 감회에 젖어버리기도 한다. 첫 번째 사진은 내가 18살이었던 1972년에 찍은 사진이다. 당시 공부를 남들보다 빠지지 않게 했던 나는 부모님과 주위의 도움으로 서울 한성고등학교로 ‘유학’을 하게 됐다. 사진 속의 장소는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에 있었던 ‘인우학사’다. 당시 ‘학사’는 사설 기숙사라고 보면 되며 오늘날의 고시원과 비슷한 역할을 했었다. 내가 살던 인우학사에서 한성고뿐만 아니라 다른 학교 학생들이 함께 숙식했었
이 기지시줄다리기 사진은 사진을 제공한 사람조차 정확히 몇 년전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된 사진이다. 최근 장경환 기지시리장이 제공한 이 한 장의 사진에는 몇십년전의 모습이 담겨 있다. 사진은 기지시 줄다리기의 대제 모습이다.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다만 새마을사업의 일환으로 1975년 시작된 지붕덧씌우기가 이뤄져 있는 집이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최소한 30년 이상 지난 것으로 보인다. 얼마 전 기지시 줄다리기 소제에서 선보였던 줄타기 공연이 이 때에는 빠질 수 없는 단골손님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장소는 기지시 시장
바다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다. 송산 성구미에서 태어나 자란 나는 평생 생활의 모든 것을 바다에서 구했다. 바다는 그 때마다 넉넉한 품으로 일용할 양식을 제공했고 뭍에서 들어온 온갖 오물을 정화했다. 평생을 바다와 같이 한 뱃사람으로서 이제 각종 개발로 나날이 오염되고 있는 바다를 볼 때마다 마음 아프기만 하다. 첫 번째 사진은 1982년 8월, 성구미 바닷가에서 아내 표완숙, 딸 정화와 함께 어구를 손질할 때 찍은 것이다. 손질하고 있는 어구는 낭장그물로 우리는 주로 낭장이나 통발을 주로 이용해 고기를 잡았다. 이처럼 고기잡이가 끝
첫 번째 사진은 송악초등학교 6학년 때인 1972년 학교 뒤편의 송악산에 소풍 가서 찍은 것이다. 오른편에 있는 학생이 나고 왼편이 친구 문재수이다. 사진에서 우리들 위쪽으로 당시 송악초등학교의 전경이 보인다. 사진에서 보듯이 그 때 학교는 단층짜리 목조건물이 전부였다. 이때만 해도 학교 주변이 모두 논으로 둘러싸였었다. 지금 나날이 바뀌고 있는 송악 중흥리와 비교하면 천지차이다. 언제나 그렇듯 그 때도 소풍은 초등학생들에게 가장 즐거운 날 중 하나였다. 사진에서 보이는 학교의 오른편에 도로가 나고 주변에 건물이 들어서면서 지금의
낡고 빛 바랜 흑백사진 한 장은 잃어버린 내 젊음과 당시의 이웃과 지역의 풍경을 그대로 담고 있어 소중한 추억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고 있다. 첫 번째 사진은 전쟁 직후인 1953년 예산중학교 3학년에 재학할 당시 고향인 예산군 주교리의 역전 신작로에서 찍은 것이다. 사진에서 맨 오른쪽이 나고 맨 왼쪽이 누이, 가운데에 부모님의 모습이 보인다. 아버지는 한시에 조예가 깊어 성균관대에서 강의를 하기도 하고 집에서 후배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저녁이면 시조를 배우려는 문하생들로 사랑방이 가득 차기도 했다. 두루마기에 중절모를 쓰
공무원에게 있어 가장 큰 긍지는 공공의 복리를 위해 일하고 주민을 위해 봉사한다는 점이다. 반면 수치스런 일도 적지 않았는데 현대사를 뒤흔든 잇단 정변과 독재정치는 공무원들의 입을 막고 온갖 규정으로 억압했다. 그 굴곡의 역사를 나는 다만 한 장의 사진으로 기록하고 소중하게 간직함으로써 후대에 좋은 교훈이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첫 번째 사진은 5·16 군사쿠데타 이듬해인 1962년 10월11일 당진군 내무과장의 송별식 때 찍은 것이다. 당시 내무과장인 조 과장이 서산군청으로 전출가면서 기념으로 군청 앞에서 찍었다. 조 과장은 조규선
유년기에, 그 보다 더 상장한 청년기에 자신만의 꿈을 향해 도전하는 젊음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 남들이 보기에 하찮은 것일지라도 나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꿈이요, 이상일 수 있다. 어린 시절 나에게 꿈은 육상이었고 좀더 성장한 청년기에는 4H회였다. 그게 무슨 돈이 되냐, 밥이 되냐 할지 몰라도 먼 훗날 가슴속에 잔잔하게 남아있는 추억은 억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소중한 기억이다. 첫번째 사진은 1969년 고산초등학교 6학년 때 육상부원들끼리 바람도 쐴 겸해서 석문면 장고항으로 놀러갔을 때 찍은 것이다. 첫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세상에는 세월의 흐름에 따라 몰라보게 변하는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수십년의 세월은 내 모습도, 마을과 고장의 모습도 변하게 만들었다. 시간에 따라 점차 바뀌어 가는 내 모습을 보노라면 아쉬움과 서글픔이 교차하기도 한다. 또한 지금과는 천지차이로 변한 우리 고장의 모습은 잔잔한 그리움과 함께 당시의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반면 좀처럼 변하지 않
억만금을 주고도, 자신의 전부를 주고도 살 수 없는 것이 젊음이라고 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어떠한 이에게는 더욱 간절할 수밖에 없다. 이제 나이 마흔넷 밖에 안된 사람이 무슨 젊음 타령이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 젊음은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신기루다. 20대 초반, 젊음의 절정기에 나는 교통사고를 당했고 이로 인해 가장 꽃다운 청춘의 한 시기를 잃어버렸다. 너무나 많은 것을 잃어버린 지금, 꿈 많고 희망으로 가득했던 20대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한 장의 사진은 그래서 더욱 소중하다. 첫 번째 사진은 21살 때 군
고향은 한 사람에게 있어 삶의 원천을 제공한다. 어렵고 힘들 때 기댈 수 있고 의지할 수 있는 고향이야말로 가장 든든한 ‘빽’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에게는 고향이 둘이 될 수도 있다. 태어나서 자란 고향과 새로운 삶을 시작하며 정착한 제2의 고향이 그것이다. 옥천은 내 뼈와 살이 만들어진 고향이지만 당진은 내게 새로운 삶을 시작한 또 하나의 고향이다.첫 번째 사진은 1996년 당진에 정착한 이후 건설회사를 경영할 무렵, 동창회에서 40년 만에 초등학교 친구들을 만나 함께 태안의 바닷가로 기념여행을 떠났을 때의 모습이다. 충북 옥천군
인간사회에서 생명의 근원은 농업이다. 지금은 한미FTA 협상에서 거래되는 흥정거리의 하나로 취급되고 있지만 수천년 동안 이 땅의 농업은 만백성의 생명을 책임지고 경제활동의 근본을 맡아왔다. 농업이, 농민이 핍박을 받는다는 것은 이 땅의 미래가 위협을 받는 것과 다름없다. 엄혹한 군사정권 시절, 농민운동을 시작하면서 그야말로 목숨을 걸어야 했지만 세상을 바꾼다는 신념으로 모든 것을 이겨냈다. 험하고 위태롭기만 한 가시밭길이었지만 한 번도 이 길을 후회한 적 없다. 첫 번째 사진은 1971년, 19살 때 옥현리의 옛집에서 찍은 것이다.
유년시절 동네에서 함께 뛰어 놀았던 친구들, 선후배들은 나에게 늘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어렵고 힘든 시기 늘 따뜻한 웃음과 가슴으로 나를 안아줬고 지친 마음을 위로해줬다. 나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그래서 안식처와 같았던 마을의 친구들은 오랜 세월이 흘러 서로 뿔뿔이 흩어져 있어도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는 것 같다. 첫번째 사진은 첫돌(75년)사진으로
젊은 시절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는 한 장의 흑백사진은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자산이다. 내게도 이렇게 젊고 푸르던 시절이 있었다는 증거이자 그 동안 힘들게 헤쳐온 삶의 궤적들을 그대로 보여주는 일지이기 때문이다. 1998년 8월8일 당진읍내를 뒤덮었던 사상초유의 집중호우는 내게서 이 소중한 기록들을 모두 앗아갔다. 남은 것이라고는 이 중학교 앨범 하나뿐이다. 그래서 다른 무엇보다 소중하기만 하다. 첫 번째 사진은 1967년 졸업을 앞두고 당진읍 채운리의 충령사 앞에서 찍은 것이다. 충령사는 순국선열의 위패를 모
봉사단체에서 활동하다 보면 돈 들어가고 시간 뺏기는 일이 다반사지만 가슴 한편에서 밀려오는 뿌듯함과 뭉클함은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다.돈으로도 채울 수 없는 이것 때문에 지난 10여년을 오로지 사회봉사에 매달렸다. 많은 것을 희생해야 했지만 한번도 후회한 적 없다. 다만 가족에게 소홀했던 것이 항상 마음에 걸린다. 첫 번째 사진은 합덕 버그네 풍물패에서 한창 활동할 당시인 1994년 6월 대전 충무체육관에서 열린 한마음체육대회에서 앉은 반 사물놀이를 공연하고 난 후 기념촬영한 것이다. 왼쪽에서 두 번째가 부쇠를 맡았던 나, 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