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천은 신라, 백제, 조선시대까지 군소재지였던 곳으로 유서가 깊은 지역이다. 면천읍성을 비롯, 영탑사 금동삼존불, 향교, 군자정 등 문화유적도 곳곳에 산재해 있어 산업화와 개발로 황폐화 되고 있는 당진에서는 보석같은 곳이기도 하다.첫번째 사진은 현재 복원사업이 추진되고 있는 풍악루와 그 주변을 볼 수 있는 일제시대 때 사진이다. 면천초등학교 학생들이 청소를
나의 처가는 대호지면 적서리다. 당진 최북단에 위치해 오지중에 오지로 꼽히던 곳이 바로 적서리였는데 결혼하기 1년 전인 1968년도, 덜컹거리는 비포장길을 달려 처음 처가에 갔던 날이 생각난다. 내 아내는 아홉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아래로 남동생만 셋을 둔 가장이었다. 어려운 살림살이에도 장모님은 그날 큰사윗감이 왔다고 씨암탉을 잡아 주셨다. 그 씨암탉 맛
이 사진을 갖고 있는 친구가 과연 있을까? 깜짝 놀랄 친구들 모습이 자못 기대된다. 때는 1958년. 중학교 1학년때로 기억한다. 무엇이 계기가 되었는지는 잘 생각나지 않는데 아무튼 우리는 모교인 상록초등학교를 찾아가 기념촬영을 했다.당시엔 중학교에 진학하는 친구들이 많지 않았는데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남자아이들은 집에서 농사일을 거들었고 여자 아이들은 대부분 시집을 갔다. 그래서 사진속에서처럼 여자애들 모습이 지금 애들과는 달리 무척 조숙했다. 아랫줄 왼쪽에서 세 번째 여자친구가 지금 신평에서 예당약방을 운영하는 심희철이다.
나의 아버지는 구룡리에서 석고공장을 운영하셨었다. 그럭저럭 공장이 잘 돼 이웃들 대부분이 먹고 살기 힘들었던 시절이었음에도 난 큰 어려움 없이 유년기를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당시로서는 선망의 대상이었던 서울 유학길에도 올라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모두 서울에서 다녔다. 고려대학교에 입학한 나는 ‘자진근로대’라는 봉사클럽에 몸담게 되었다. 일찌감치 ‘서울물’을 먹었음에도 상부상조하는 농촌의 정서가 강하게 남아 있었던 것 같다. 자진근로대는 주로 방학을 이용해 농촌봉사활동이나 보육원 같은 곳을 방문하는 써클이었다. 그 당시 농
이병노 충청남도 태권도 협회 전무이사. 당진군체육회 사무국장남들은 내가 여러가지 감투를 맡아 이일 저일 해온 것으로 알지만 사실 난 태권도밖에 한게 없다. 사회봉사 일환으로 자유총연맹 사무국장 일을 했었지만 그건 말그대로 봉사일 뿐이었다. 난 예나 지금이나 태권도로 먹고 살고 내 주위사람들 대부분이 태권도로 맺어진 인연들이다. 그리고 해질무렵이면 그 사람들
당진상고(현 당진정보고)재학시절 난 어지간히 ‘땡땡이’를 잘 치는 이른바 문제학생이었다. 학교공부는 정말 재미없었고 친구들과 어울려 과수원으로 서리하러 다니고 학교뒷산에서 호떡내기 ‘나이롱뽕’을 치는 재미로 하루하루를 보냈다.첫번째 사진은 그 시절 대덕리 송정의 한 복숭아 과수원에서 서리를 하는 장면이다. 그때 공범(?)이었던 친구들이 나만 범행 현장에 밀어넣고는 짖꿎게 사진을 찍어버렸다. 교복모자에 복숭아를 가득 따서 풀섶에 숨겨두었다가 다음날 가 보면 어느새 딱딱했던 복숭아가 말랑말랑해져 먹기에 딱 좋았던 기억이 난다. 그때 서
새하얀 눈이 초가집 지붕에 내려앉은 풍경 앞에 두 사람이 있다. 바로 40여년 전 사촌누나(이부자(61), 인천시)와 나의 모습이다. 온 세상이 그야말로 하얗던 사진 속 장소는 사촌누나가 살았던 서산시 부석면 취평리로 방학이 되어 누님집에 가는 일은 의례적인 일이었을 만큼 누나와 난 가깝게 지냈다. 또 먹을거리가 많지 않았던 시절 누나가 건넨 김이 모락모락
‘죽도록 사랑하자’, ‘외로운 비탈길’, ‘다시 오는 그날에...’, ‘짧아도 굵게’, ‘인생은 나이롱뽕(인생은 도박이다)’... 빛이 바랜 당진상고(현 당진정보고) 졸업앨범의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같은 반 친구들의 낙서들이다. 시간은 종이를 헐겁게 하고 누런색을 입혔지만 뭐랄까! 다른 느낌이다. 벌써 40년 전 얘기들인데 ‘저렇게 좋은 시절이 있었구나
첫번째 사진은 목욕탕이 없었던 시절, 잿물로 겨 비누를 만들어 쓸 때의 사진이다. 딸아이(최은희, 33)가 펌프 옆에서 세수를 하고 있는데 사진 속 장소는 지금 살고 있는 신당리 집 앞의 30년 전 모습이다. 사진이 있기에 그런 시절이 있었는지 알 수 있다. 딸아이는 원 속의 사진처럼 커서 벌써 아이를 낳았고, 세상은 모를 정도로 달라졌으니 흑백사진 속 3
장시간 비행을 통해 도착했던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라크. 첫번째 사진은 중동국가에서 건설근로자로 지냈던 그 때의 모습을 담고 있다. 내 옆의 이라크 소년은 목동이고 넓은 사막 위 양떼의 모습에서 이라크의 한 정취를 느낄 수 있다. 나는 중동의 여러 국가에서 5년이라는 세월동안 건설근로자로 일했다. 누군가 인생의 전환점이 언제였냐고 묻는다면 바로 이때라고 대답할
수줍은 미소가 정겨운 첫번째 사진은 1984년 아내(김영자, 46)와 결혼식을 마치고 신혼여행을 떠나기 직전찍은 사진이다. 이름은 생각나지 않지만 누군가의 농담에 아내와 난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집안일을 썩 잘하는 아내는 내조를 많이 하는 편이다. 농기계 판매 일을 하는 나는 그래서 밖에서 일하기가 편했고 한가지 일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돌아가
첫번째 사진은 젊은 시절 예비군 훈련에 다녀오다 기지시리의 한 사진관 앞에서 찍은 사진이다. 잡지를 보고 있는 모습을 찍었는데 70년대 기지시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당시에는 지금과 달리 사진기가 많지 않았고 사진사에 부탁해야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부족한 것은 사진뿐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때는 그 나름대로의 행복이 존재했다. ‘약혼기념’이라고 쓰여
추억은 바쁘게 살아온 사람들과는 거리를 두는 것일까! 막상 추억이 서려있는 사진 몇 장을 꺼내놓으려니 내놓을 사진이 마땅치 않다. 첫번째 사진과 두번째 사진에는 젊은 시절 나와 아내(조채순, 54)의 모습이 담겨있다. 나는 2군단 헌병대에서 행정병으로 근무하고 있고, 아내는 장모님(고 김분재씨)과 고향집에서 정겹게 사진을 찍고 있다. 이후 두 사람은 중매로
시냇물에 종이배를 띄우고 잠시 기다리면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해지는 조각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을까!’ 대부분의 것들은 시간이 지나면 빛이 바래고 희미해진다. 부모님과 함께한 첫 번째 모습은 사진이 없었다면 더 희미해졌을 1960년대 내 가족들의 모습이다. 뒷 배경으로 보이는 집은 어느덧 2층집이 되어 있고 나는 그곳에서 아내(황미화, 35)와
혼자 만드는 추억이란 것이 과연 있을까! 나의 추억 속에는 항상 함께 했던 사람들이 있다. 그립기만 한 친구와 마을 사람들 그리고 사랑스런 가족... 그들이 함께 있기에 나는 오랜만에 나의 지난날들을 보며 미소 지을 수 있다. 첫번째 사진은 중학교 입학식이 있었던 1968년 봄 사진이다. 사진 속 원 안에 있는 사람이 바로 나이고 보이는 건물은 지금의 한독
돌이켜보면 ‘삶의 테두리’라는 것이 있는 것 같다. 가장 소중하게 생각했던 새마을금고, 정당, 교회, 종친회는 내가 속해 있었던 삶의 범주들이었다. 사진 속 보이는 하얀 저고리에 검정치마를 입은 아내(육희영, 1998년 작고)의 모습은 1946년 인천 송림동으로 나를 이끈다. 입대를 앞두고 사촌형(손달환)이 꼭 필요할 것이라면서 집 앞에서 찍어준 사진이다.
펼쳐볼 기회가 많지 않았던 우리가족 앨범에는 전부는 아니지만 지난 시절들이 드리워져 있다. 부모님을 일찍 여읜 탓에 우리 부부는 농사일과 육아를 함께 해야 했다. 아내는 갓 태어난 딸아이를 등에 업고 일꾼들에게 줄 ‘밥 다라’를 머리에 인 채 막걸리가 넘칠 듯 담긴 주전자를 손에 들고 그 당시 논이 있었던 면천면 삼웅리까지 ‘밥 배달’을 했다. 형편이 좋지
고단한 일생을 살면서 누구나 한번쯤 돈벼락 맞는 꿈을 꾸었을 것이다. 복권에 당첨되거나 하루 아침에 유명인이 되어 스폿라이트를 받거나 하는 꿈 말이다. 지금으로부터 30여년전, 내 나이 서른하고도 다섯 되던 해, 왜목에서 어업으로 살아가던 나에게 정말 꿈같은 일이 일어났다. 봄기운이 느껴지던 2월말 즈음이었다. 겨우내 무리지어 움츠리고 있던 숭어떼가 날이 풀리자 이동하던 중 내가 쳐 놓은 건간망에 걸려 들었던 것이다. 당시 내 그물에 걸려든 숭어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동네 사람들이 모두 동원되어 하루 종일 지어 날
‘추억’은 단지 두 글자일 뿐이지만 추억이라는 말에는 많은 뜻이 숨어있다. 그리운 사람, 사연, 상처 그리고 수없이 품었던 꿈들... 하지만 빼놓을 수 없는 것 하나가 바로 ‘눈물’이다. 내가 눈물을 흘린 사연은 이렇다. 고향친구들 대부분이 그랬듯 나 역시도 젊은 시절 소위 ‘상경’이란 것을 해서 직장 생활을 하게 됐다. 직장생활이 수월하진 않았지만 고향에
첫 번째 사진은 지금의 내가 ‘가장 오래전의 나’를 만날 수 있는 사진이다. 중풍으로 오랜 시간 앓다가 돌아가신 어머니(이은순)와 돌 때 찍은 사진인데 내겐 정말 소중하기만 하다. 젊은 시절의 순진함이 깃들어 있는 두 번째 사진은 친구 정형진(43)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그 시절의 난 마음속에 단편문학가를 꿈꿨었다. 또 지금은 미소를 짓게 하지만 영화배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