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흘리개 어린 시절, 가장 즐거운 날을 꼽으라고 하면 뭐니뭐니해도 소풍과 운동회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작은 것 하나에도 기뻐하고 행복해 했던 그 때가 진정 소중했던 시기인 것 같다. 모두들 어려운 때였지만 가족들이 항상 곁에 있어 마음 든든했다. 내게 고향 마을과 초등학교는 언제나 아름다운 동화의 한 페이지다. 아래쪽 사진은 석문초등학교 1학년 때인 19
도움말 정덕영 - 대호지면 마중리배움에 대한 뜨거운 열의는 있었으되 가정형편상 제대로 된 중등교육을 받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다.생계가 당장 위협을 받고 있는 시기에 어떻게 보면 상급학교 진학은 당시 아이들에게는 꿈과 같은 일이었다.특히 면 지역일수록 이같은 현상은 더욱 심했으며 따라서 배움에 대한 갈증도 심했다.사진은 대호지 재건중학교의 제1회 수료생들의 모습으로 지금 사람들에게는 이름도 생소하기만 한 학교일 것이다.그러나 당시 어려운 사정으로 배울 길이 없던 청소년들에게 재건중학교는 메마른 땅에 우물과도 같은 존재였다.정식 중학교
첫 번째 사진은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돌아다녔던 20살 무렵, 우강면 창리의 ‘옷밥골’에서 함께 어울려 다니던 동네 친구들과 찍은 것이다. 뒷줄 맨 오른쪽의 청재킷을 입은 이가 나다. 그 앞에 하얀 옷에 선글라스를 쓴 멋쟁이 청년은 김화묵, 그 왼쪽이 오세철, 그 왼쪽의 선글라스를 쓴 이가 우승재다. 다들 어렵게 살았지만 20살의 우리들은 나름대로 멋을 부리고 사진 찍기를 즐겼다.엄혹한 정치상황과 절대빈곤에 시달렸던 시기였지만 우리는 늘 웃음과 희망을 잃지 않았다.특히 당시 농촌에는 젊은이들이 많았고 따라서 희망도 있었다. 피 끓
내 한평생을 한마디로 압축하라고 한다면 ‘고향’과 ‘공직’으로 표현하고 싶다. 20대 열혈 청년기에 시작한 공직생활은 평생의 직업이었고 가치관이었으며 화두였다. 지금은 순성농협 조합장으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또한 늘 든든한 마음의 안식처였던 고향 당진은 지금의 나를 있게 해주었던 원동력이자 따뜻한 쉼터였다.첫 번째 사진은 1959년 정미면의 천의초등학교 졸업사진이다. 까까머리에 학생복 차림의 아이들 중 뒷줄 오른쪽에서 다섯 번째가 나다. 작은 원안의 내 사진은 지금 봐도 어쩌면 지금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는지 신기하기만 하
역경은 한 사람을 거듭 태어나게 만든다. 전쟁을 겪은 소년은 이미 소년이 아니듯 사선(死線)을 넘은 사람에게 그 뒤에 찾아오는 어려움은 더 이상 어려움이 아니었다. 수많은 역경을 이겨낸 나는 비 온 뒤에 땅이 굳듯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더욱 강해질 수 있었다.첫 번째 사진은 1969년 늦가을에 군대에서 찍은 것이다. 군인들이 쓰고 있는 검은 베레모에서
인생을 쏜살같다고 했던가. 마흔도 안된 나이에 이런 말 하기 쑥스럽지 않느냐고 할 분도 계시겠지만 코흘리개 아이였던 내가 어느덧 같은 또래의 아이를 둔 엄마가 됐다. 흘러간 시간과 젊음이 아쉽기도 하지만 내 곁을 지켜주는 가족이 있어 든든하기만 하다. 첫 번째 사진은 1974년 할아버지 회갑을 맞이해 정미면 천의리의 본가에서 가족과 함께 찍은 것이다. 앞줄
고향인 신평면 매산리는 내게 늘 따뜻한 보금자리였고 삶의 터전이었으며 꿈을 키우고 희망을 만들었던 인생의 산실이었다. 많은 이들이 고향을 떠날 때 나는 흙의 정직함을 배우며 희망을 찾으려 했고 새로운 도전으로 삶의 보람을 찾았다. 치열했던 인생의 한 시기를 지나 이제 조금은 여유를 갖고 돌아보는 인생의 한 장면은 늘 새롭게 다가온다. 첫 번째 사진은 당진정보고(당시 당진상고) 2학년에 재학하고 있을 무렵 토요일 수업을 마치고 면천의 영탑사에 들러 찍은 것이다. 버스를 타고 비포장길을 달려간 영탑사는 공부에 지친 우리의 마음을 편안하
내 한 평생은 공직생활로 압축된다. 공직은 내게 직업이자 삶의 목표이기도 했다. 그 동안 무수한 어려움과 좌절도 있었지만 공직생활을 통한 자아실현과 사회에 대한 봉사라는 목표를 포기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토목직 공무원으로, 별정직 우체국장으로, 군의회 의원으로 활동하면서 지역발전을 위해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한다. 첫 번째 사진은 1970년 강원도 철원의 육군 3사단에서 군 복무할 때의 모습이다. 보직은 PX병이었는데 자리가 자리인 만큼 고생하던 동기들보다는 그래도 좀더 편하게 복무할 수 있었다. 솔잎가지로 만든 목걸이를
고향인 우강은 내게 평생을 보낸 마음의 안식처다. 이 곳에서 나고 자라면서 세상에 대한 꿈을 키웠다. 일제시대 말기 수탈의 역사와 동족간 전쟁으로 한 마을 사람들끼리도 총을 겨누어야 했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우리세대들은 숱한 어려움에 처했었지만 결국 이를 극복하고 지금의 이 마을을, 그리고 이 고장을 만들었다. 이제 내 나이도 칠순이 됐다. 세상사 일에 한발 물러나 서예에 취미를 두고 묵향에 취해 지내며 가끔 옛날을 추억해 본다. 첫 번째 사진은 한국전쟁 후인 1950년대 후반으로 우강면 창리의 옛날 집에서 열렸던 누님 유갑준의 결
평생을 교직에 몸담는 동안 제자들과 함께 어울리고 같이 뛰어 놀면서 보람있게 보냈다. 특히 체육에 남다른 관심과 특기를 가진 나는 어려서부터 다양한 종목의 체육경기를 익히며 부임하는 학교마다 좋은 성적을 거뒀다. 초등학교 때 육상에서 출발한 나의 체육인생은 빙상, 축구, 기계체조에까지 이어졌다. 특히 기지초등학교에서 교감으로 재직시 학생들과 어울려 인라인스케이트를 탔던 일은 당시 상당한 화제가 되기도 했다.첫 번째 사진은 1962년 5월19일, 그러니까 내가 신평초등학교 6학년에 다닐 때 5·16기념 초등학교 종합체육대회에서 당진군
유도는 내 인생에서 전부나 다름없다. 수많은 어려움과 역경 속에서도 오늘의 나를 있게 해줬고 약해지는 자신을 강하게 채찍질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공주사대 부고 1학년 재학시 유도부의 정태수 선생님이 공주경찰서 도장에서 선보였던 ‘허리튀기’ 기술은 어린 내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고등학교 유도부에서 활동하다가 용인대에 진학하게 되면서 나의 유도인생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첫 번째 사진은 1960년대 초반 용인대학에 재학하던 시절의 모습이다. 지금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젊고 패기에 찬 모습이다. 용인대학에 입학할 당시
내 일생은 배드민턴과 늘 함께였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배드민턴은 나에게 신앙이었고 마음의 지주였으며 그 무엇을 주고도 바꾸지 못할 삶의 전부였다. 중학교 때 우연히 체육교사의 눈에 띄어 시작한 배드민턴은 나와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기에 충분했다. 논산이 고향인 나는 배드민턴 순회코치로 발령받으면서 당진과의 길고 긴 인연이 시작됐다.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당진의 배드민턴의 전국을 잇따라 제패하는 모습을 보면서 충분히 보상을 받고 있다.첫 번째 사진은 1980년 3월 서울의 종합체육관에서 열렸던 제18회 전국 춘계종별 배드민턴
내가 농협에 들어간 것은 1972년도였다. 합덕농고를 나와 시험을 치러 당진군농협 합덕지소에 입사를 했는데 당시 월급이 30여만원으로 쌀 한가마값이 2만5천원이었으니 열가마 이상인 셈이었다. 당진군내에는 면천, 합덕, 송악, 천의 등 4개의 지소가 각 마을 이동조합을 관할했었다. 그러다가 75년도에 이동조합이 합쳐져 지금의 면단위 조합이 탄생됐고 조합장 직선제가 도입되면서 지역농협으로 각자의 살림을 꾸려가고 있다.첫 번째 사진은 농협에 입사한 첫해인 1972년도 합덕지소 앞에서 지소장(앞줄 가운데) 송별기념으로 찍은 사진이다. 지금
첫 번째 사진은 자유당 시절인 1954년도, 이승만대통령의 생일을 기념해 각 부락 노인들을 초청해 경노잔치를 여는 장면이다. 이곳은 ‘면주막’으로 면에서 맡아놓고 하던 밥집인데 경노잔치뿐만이 아니라 이장회의가 있는 날이나 숙직을 한 면직원들이 밥을 시켜먹곤 하던 곳이다.‘이대통령 각하 제 84회 탄신기념 대호지면 부락 경노회장’이라고 쓰인 팻말이 걸려있다. 옆에 양복을 입고 앉아있는 이가 당시 남상일 면장이고 왼쪽에 주전자를 들고 서 있는 이가 자유당 대호지면책이었던 남창우다.두 번째 사진은 내가 대호지면 재무계장으로 있을때 손흥원
예전엔 집주인들이 세를 올려 달라는 말을 요즘처럼 쉽게 하지 못했다. 대부분 ‘아들이 건물을 쓰겠다고 한다’거나 ‘내가 직접 가게를 해야겠다’는 식으로 돌려서 말하곤 했다. 무일푼으로 장사를 시작한 나는 집세를 올려줄 형편이 못 되어 열세번이나 이사를 다녀야 했다.첫 번째 사진은 1972년도, 지금의 구 당진경찰서 앞(당문사 자리)에서 잡화점을 하던 때이다. 오른쪽에 살짝 당시의 당진읍내의 비포장 거리가 보인다. 당시 읍내 거리에는 소하천이 두개였다. 간혹 장마철에 하천이 범람해 가게로 물이 들어올 새라 양동이로 빗물을 퍼내던 기억
월사금이 없어 초등학교 졸업장도 받지 못한 나는 일찌감치 객지에 나가 떠돌다가 스무살 되던 해 고향 당진으로 내려왔다. 땅 한평도, 장사 밑천 한 푼도 없었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자장면집 배달부일 아니면 시장에서 100원에 3개 하던 밀가루 빵을 사다가 150원을 받고 되파는 일 등등 이었다. 그러다가 월세 가게를 얻어 빵집을 차렸고 만화가게를 하기도 했다. 도장 파는 기술을 배워서 인문당이라는 가게를 하기도 했고 생활잡화를 취급했다. 미장일을 하셨던 아버지를 따라 보일러 놓는 일을 하기도 했고 연탄숯 장사를 할 땐 새벽 4
내가 학교에 입학한 것은 열 살 때인 1937년도, 일제치하였다. 학교명은 당진공립보통학교. 현재 당진초등학교의 전신이다. 학교는 현재 당진군청의 뒤, 즉, 당진성당 자리에 위치했는데 내가 입학한 그 이듬해 지금의 당진초등학교 자리로 이전했다.사진 오른쪽 끝에 보이는 나무는 지금도 건재한 당진성당 은행나무다. 왼쪽에 보이는 한옥은 학교 사무실이었고 은행나무 옆 건물은 교실로 쓰이던 곳이었다.입학식에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부모들이 함께 참여했다. 학생들 뒤로 빼곡히 늘어서 있는 가족들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나는 열 살에 입학했지만 나보
1958년도 계성초등학교 주변 모습이다. 첫번째 사진은 택지개발로 사라진 구 보건소 자리에서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 학교주변의 초가집들이 인상적이다. 학교와 이 초가집들 사이엔 울타리가 없었다. 그래서 이들 집앞 마당의 버찌, 보리수수가 남아나질 않았었다. 초가집 옆으로 작은 판자집 한 채가 보이는데 ‘미미사’로 불리던 문방구점으로 기억된다. 연필과 공책,
큰형님(인긍환)은 일찍이 세상을 등지신 아버님을 대신해 동생들을 자식처럼 돌보셨다. 5남매 중 막내였던 나와 큰형님과의 나이차가 무려 20여살 가까이 되었으니 나에겐 실제 아버님 같았다. 아버님보다 큰형님에 대한 추억이 훨씬 많은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이 사진은 내가 일곱살 때,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1939년도 봄, 벚꽃이 피었을 때 군자정 돌다리에서 찍은 사진이다. 생애 처음으로 찍은 것이기에 가장 귀하게 여기는 사진이다.어느날 큰형님이 학교에 오셨다. 꽃이 피었으니 나가서 사진을 찍자고 하시며 데리고 가신 곳이 바로 군자
남들은 다 갖고 있는 결혼식 사진이 내겐 없다. 결혼식날 사진을 찍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서 구식으로 혼례를 치르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날 마침 아랫집에 사는 친구가 산기가 있어 혼례 치르는날 주위에서 애를 낳으면 산부정을 탄다고 하여 애를 낳기 전에 얼른 식을 올리고 시댁으로 갔기 때문이다. 사진을 찍지 못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폐백드릴 술이며 혼수인 재봉틀까지 놓고 왔던 기억이 난다. 요란하게 시집을 온 나는 이후 가정생활은 별탈없이 잘 지내왔다.첫 번째 사진은 그동안 결혼사진이 없는 아쉬움을 달래주었던 약혼사진이다.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