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내 얼룩 훔쳐갔어!!” 아기 돼지 데데의 몸에 멋지게 있던 얼룩들이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최하진 일러스트레이터는동화책 를 통해 아기돼지 데데가 얼룩을 찾아가는 과정을 기발하고 독창적인 상상력으로 그려냈다. 아미미술관 벽에 걸린 이 동화책의 한 장면 장면을 따라 읽어가다 보면 어느새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놓을 수 없던 붓어릴 때부터 그림에 관심이 많았던 최하진 일러스트레이터의 꿈은 만화가였다. 부모님(故 최원기·유상옥)은 공부를 곧잘 하던 딸이었기에 최 작가가 예술계통보다는 전문적인 직업을 갖기를
친구를 좋아한 의리파 소년이 어느덧 자라 인구 67만 명을 대표하는 시의원이 됐다. 연고도 없던 도시에서 꿋꿋하게 의정활동을 한 그는 이제는 4선 시의원으로서 천안에 자리매김했다. 돌이켜보면 학연, 지연이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냉철하고, 철저하게 사안을 판단하며 천안시민을 대표할 수 있었다.천안시의회 ‘최다’의원면천면 죽동리 출신의 인치견 천안시의회 의장은 인구 70만 명을 바라보는 천안시의 의회 의장이다. 지난 2008년부터 시민의 표를 얻어 4선 의원이 된 그는 천안시의회 의원 중 최다 당선의원이기도 하다. 지난해에는 제8
정미면 봉생리에 자리한 ‘사랑의 정원&의재 아뜰리에’는 홍순조·이재련 교사 부부의 작은 별장이다. 삶의 휴식처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밑그림을 그려놓은 꿈들이 채색돼 가는 곳이다.별장 곳곳엔 재미난 것들이 숨겨져 있다. 화실과 텃밭이 있고, 푸른 잔디는 미니골프장이 되기도 한다. 또 지인들과 함께하는 파티장소가 될 때도 있다. 20여 년 간 부부가 손길을 더해가며 차근차근 만들어 온 정원이다. 하지만 이 별장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동생을 향한 사랑과 가족에 대한 애틋함, 그리고 홍순조 수석교사의 과거와 미래가 모두 담겨 있는 곳이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세상은 편리해졌지만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일에는 여전히 몸과 마음을 써야 한다. 묵묵히 오랜 시간동안 우리 삶에서 봉사하며 지역사회를 아름답게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83세에 봉사하는 노인 김응배 씨도 그 중 하나다. 김 씨의 따듯한 손길이 닿으면, 우리의 마음에도 훈훈한 온기가 스며든다. 20여 년 간 수지침 봉사정미면 천의리에 거주하는 김응배 씨는 봉사로 노년의 삶을 꽃 피우고 있다. 특히 20여 년 동안 한 봉사에 매진해온 그의 모습은 이웃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83세의 김 씨는 당진시자원봉사센터
모두 각자의 이유로 학업을 중단해야만 했다. 바삐 살다 문득 멈춰 뒤를 돌아봤을 때 남은 건 ‘배우지 못한 한(恨)’이었다. 친구들과의 모임 자리에서 어김없이 동창회 이야기가 오갔다. 동창회를 나갔더니 누굴 만났더라는 말은 다른 이들에겐 너무도 평범했다. 그럴 때마다 속상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배움의 한이 못내 사무칠 때 그들은 해나루시민학교(교장 문선이)를 만났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어요. 어려운 형편에 어머니와 9남매 가족들을 뒷바라지 하느라 정작 저는 학교 문턱을 못 넘었어요. 젊었을 땐 당연히 꿈이 있었죠. 하지
88세의 나이에도 오로지 꿈 때문에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는 이가 있다. 재가노인 요양보호사인 김명수 씨는 본인 또한 노인이면서 또 다른 노인 가정을 방문해 소·대변 처리부터 목욕, 은행업무, 쇼핑 등 크고 작은 일을 도우며, 노인의 손과 발이 돼주고 있다. “놀아서 뭐해요. 집에 있어봤자 TV밖에 볼 게 없는데 요양보호사로 일하면 보람도 있고 돈도 벌 수 있어 훨씬 좋아요.” 김 씨는 88세의 나이에도 품에 안은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산다. 바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 그래서 건강하게 살기 위해 노력하며 열정적으로 살아가고
집집마다 풍겨오던 구수한 술 익는 냄새는 없어진지 오래지만, 여전히 술은 삶에서 뗄 레야 뗄 수 없는 존재다. 잔칫집에도, 상갓집에도, 기쁜 날에도, 슬픈 날에도 술은 어김없이 사람들과 함께 한다. 막걸리와 동동주 등 집집마다 전통주를 빚어 먹었던 시절을 지나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전통주는 침몰하기 시작했고, 광복 이후에도 계속된 정부의 정책으로 우리나라에서 전통주의 명맥은 거의 끊기다 시피 했다. 그리고 지금은 맥주와 와인부터 위스키, 브랜디, 보드카, 데킬라 등 세계 각국의 술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 시대가 됐다. 끊임없
“음식투정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저녁시간엔 인터넷쇼핑 자제 요청함”“양말을 뒤집어서 벗지 않았으므로 개선되었음”“잔소리를 많이 해서 미안하다. 잔소리를 줄이겠다”“친구들이 놀러온 날 일하는 도중에 맛있는 것을 잔뜩 사다줘서 고마웠다”가족회의를 했던 회의록의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당시 고민스러웠던 일들이나 서로에게 마음이 상했던 일들도 지금 돌이켜보면 켜켜이 쌓인 시간 속에서 건강한 가정을 만들어 나가는 밑그림이 됐다.면천면 성상리에 살고 있는 최승규·문경자(42) 씨 가족은 매달 가족회의를
어려서부터 노래를 즐겨 불렀던 한 소녀는 이제 머리카락이 희끗하게 샌 할머니가 됐다. 수십 년 간 노래를 배우고, 또 부르고 싶어 했던 열정과 열망을 한평생 마음 속 깊은 곳에 담고 살아 온 김숙희 씨가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남들이 쉽게 새로운 도전하지 못할 나이 71세에 백석예술대학교 부설 평생교육원 성악과에 입학하며,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독학으로 깨우친 음악4남매 중 외동 딸로 태어난 김숙희 씨는 어릴 적부터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했다. 놀거리가 없던 시절 어머니 따라 교회를 다니며 노래를 배웠던 그는 무대만 있다면 언제든
“왜 보통의 또래들과 다른 길을 걷는지 친구들도 저를 궁금해 해요. 농업은 경쟁이 아닌 공생을 추구하는 점이 제가 이 길을 택한 이유에요.”대부분의 10대는 대학 입시로, 20대에는 취업 준비로 경쟁사회에 들어선다. 하지만 23세 김도혜 씨는 경쟁이 아닌 ‘상생’을 택했다. 친구들이 도시로 떠날 때 도혜 씨는 농업인의 길을 걷고자 전주로 향했다. 농사는 ‘일상’…농업인의 길을 걷다도혜 씨는 예산군 고덕면 몽곡리 출신이다. 달래, 꽈리고추 등 밭농사를 지었던 부모 밑에서 4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부모님이 달래를 캘 적
“나는 민요 가수가 될 거야!”순성초등학교에 다니는 이소담 양은 학교가 끝나면 곧장 학원으로 향한다. 여느 아이들처럼 수학학원이나 영어학원인가 싶지만 소담 양의 발이 멈춘 곳은 채운동에 위치한 한 국악 교육원. 소담 양은 어른들 틈에서도 기죽지 않고 당차게 노래를 부른다.아빠에게 물려받은 끼와 재능무대에 오르면 언제 긴장했냐는 듯 시원하게 곡조를 뽑아내는 소담 양은 낯을 많이 가리고 소극적인 성격이었다. 부모에게 떨어져서 다른 곳에는 앉지도 못했을 정도였다.하지만 그런 아이가 사람들 앞에서서 노래를 부르곤 했다. 소파, 계단에 올라
100세 시대. 일해 온 날들보다 은퇴 후 살아갈 날이 더 긴 요즘, 퇴직 후 새로운 인생을 설계해야 하는 건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두의 숙제다. 일할 때에는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가도, 노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무언가 할 일이 있다는 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머지않아 깨닫게 된단다.그래서 요즘 사람들에게 ‘인생 이모작’은 필수다. 젊은 시절 청춘을 다 바쳤던 직장에서 은퇴한 뒤, 노년에 접어들 무렵 또다시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이다. 비단 돈벌이 때문만은 아니다. 은퇴 후 30~40년의 여생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문학소년 철
‘키덜트’란 어린이를 뜻하는 ‘키드’(Kid)와 어른을 의미하는 ‘어덜트’(Adult)의 합성어로 ‘아이들 같은 감성과 취향을 지닌 어른’을 말한다. 최근 키덜트 문화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면서, 키덜트를 소재로 한 전시는 물론 상품을 판매하는 가게까지 생겨났다. 동심을 떠올리게 하는 키덜트는 하나의 문화, 하나의 라이프스타일로 자리 잡았으며, 바쁜 현대인들은 키덜트 문화를 통해 각박한 삶에서 벗어나 정서적·심리적 안정을 찾고 스트레스를 해소한다. “앨리스가 된 기분”당진 구터미널 인근에 작지
직업과 나이, 노래실력을 숨기고, 얼굴과 몇 가지 단서만으로 ‘실력자’인지 ‘음치’인지를 가리는 음악 추리 프로그램인 엠넷의 에 훈훈한 외모의 남성이 지난달 22일 소개됐다. 그는 마이크를 들고 있는 자세 그리고 울대를 울리는 것까지 완벽하게 선보이며 방송인들과 방청객들에게 실력자임을 증명했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 라운드에서 음치로 지목되며 무대에 올랐고 가수 박효신의 노래 의 첫 소절을 부르자 스튜디오의 패널들과 방청객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음치 중에 음치였기 때문이다. 방송인들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던 그해 11월, 이송우 옹은 송산면 송석리에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가 지나 광복이 찾아 왔고 곧이어 6.25 전쟁이 발발했다. 1960~1970년대 산업화와 근대화 그리고 민주화까지 역동의 근대사를 살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새 101세가 됐다.“나도 내가 이렇게 오래 살 줄은 몰랐다”는 이송우 옹은 백수를 넘긴 오늘이 행복하다. 요즘 매일 당진시노인복지관으로 출근 도장을 찍는 그는 20살이나 차이나는 젊은(?) 친구를 앞에 두고 장기 두는 재미에 푹 빠졌다. 뒤늦은 즐거움에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
한기창 옹은 매주 일요일, 교육자료가 두둑하게 담긴 가방을 안고 면천향교로 향한다. 한 평생 교단에 섰던 그는, 교사를 퇴직한 후에도 마을회관과 노인복지관에서 노인을 비롯한 주민들에게 한자를 가르쳤다. 한동안 활동을 중단했지만 가르침에 대한 열정이 그를 다시 일으켰고, 요즘은 매주 일요일마다 면천향교에서 생활한자를 가르치고 있다. 현재 한기창 옹은 88세의 나이 지긋한 노인이 됐지만, 그의 한자사랑과 교육열은 청년처럼 뜨겁다. 금산고에서 시작한 교직생활한기창 옹은 1965년 금산고등학교에서 첫 교편을 잡았다. 그곳에서
강뽀리. 사기소리에서 뽀리뱅이놀이터를 운영하고 있는 강정숙 대표의 별명이다. 뽀리뱅이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풀이다. 나라가 어려웠던 시절에는 뽀리뱅이를 봄나물로 무쳐 먹을 정도로 뽀리뱅이는 지천에 널린 잡초이면서도 여러모로 활용됐다. 강정숙 대표는 “뽀리뱅이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식물이지만 관심이 없으면 눈에 잘 띄지 않는 들풀”이라며 “제 역할을 충분히 하는 뽀리뱅이처럼 살고 싶다”고 말했다.“뽀리뱅이는 봄에 꽃을 피워 열매를 맺고, 가을에 싹을 틔워요. 그리고 추운 겨울을 견디죠. 뽀리뱅이처럼 살고 싶어서 뽀
“오로지 나무만 보고 당진에 왔죠”청양 출신의 이한수 목공예가의 인생은 오롯이 나무와 함께 해왔다. 아버지를 일찍 여인 이 작가는 나무로 집을 짓는 대목장인 할아버지 밑에서 자랐다.할아버지에게 직접 일을 배우진 않았지만 나무, 조각, 공예와 가까이 하며 유년기를 보냈다.이 작가의 35년 외길인생은 그의 나이 16살 때부터 시작됐다.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 무렵, 미술교사가 그의 예술적 재능을 알아보고 그에게 조각을 권유한 것이다.이 작가는 “선생님이 ‘천상 너는 이 길이다. 이 것(조각)으로 밥은 먹고 살 것’이라고 말하며 길을 제
“너 죽기 싫으면 운동해라.”농담으로 던진 친구의 말이 요샛말로 뼈를 때렸다. 평소라면 한 귀로 흘려들었겠지만 갑상선암 3기를 선고받고 대수술을 마친 그에겐 쉽게 넘길 수 없는 말이었다. 탁구에 골프, 자전거 등 남들이 하는 것은 다 해봤다. 하지만 살은 도무지 빠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 무렵 친구가 산에 한 번 가보라고 한 말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산으로 향했다. 그렇게 강남기 팀장의 전국 100대 명산 도전이 시작됐다.“12월 연말 회식이 많잖아요. 회식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면 얼굴이 탱탱 붓는거예요. 얼마나 심했
대림오토바이 당진대리점 이덕형·이재범 부자(父子)의 오토바이 인생을 합치면 장장 56년이다. 아버지 이덕형 씨는 46년, 아들 이재범 씨는 10년째 오토바이 사랑을 이어오고 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 일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지만 아들 재범 씨는 덜컥 회사를 그만둬버렸다. 아버지 덕형 씨도 아들의 열정 앞에선 별 수 없었다. 그렇게 10년, 이 씨 부자가 함께 대림오토바이 당진대리점을 운영해 오고 있다. 아버지의 오토바이1973년 1월, 지금으로부터 46년 전 아버지 이 씨는 오토바이를 만지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자동차는 고사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