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시작된 곳 김태숙 어디서 오는지 모른다 갈기 휘날리는 대바람 말떼같이 달려서 기수가 누구인지 모른다 우리 사는 지상 한 척의 담을 넘어 세상을 울리는 것은 소리뿐인지 모른다 대바람 머리에서 날린 음(音)들이 얼어 다시 첫눈 내리는 백암사 어둠의 눈(目) 위로 시간을 쪼개며 절마당을 덮는 눈도 언제부터 내리기 시작한 건지 모른다 바람에 불려와 방문앞에
두 세계의 사이 -휴일, 빨래를 개면서 김태숙 밤의 우주를 여행하고 돌아온 경건한 하루가 또 단두대에 목을 내밀었다. 벌써 몇날째인가 10년을 하루같이 목매달아도 다시금 살아나는 아침, 또다시 죽기 위해 밤에 가는 여행은 늘 거기까지 뿐. 아침은 우리에게 또 일어나라 하고, 잠들기 위해 밥먹으라 하고, 배설하기 위해 또 빨래하라 한다, 더립히기 위해 질긴
부재(不在)김태숙 아주 가끔 도서관에 가는 일은 박물관에 가는 일이다 시간을 돌아 서늘한 침묵속으로 침묵 속에 앉은 밝은 그늘 속으로 나이 서른에 지금은 남의 학교가 된 국민학교 교실에 앉아본 일이 있었다 오로지 나아가기 위해 파몰했던 곳으로 그러나 이젠 허우적 허우적 숨돌리러 돌아가는 박물관으로 도선관에 가곤 한다 단발머리가 고개숙여 책을 보고 대출구에서
남산 솔숲김태숙 풀하나 돋지 않은 동산 비탈에소나무 아직 즐비한 걸 보면우리네 20대가 저랬던가 싶다언제나 첫발이기를 비탈에 서서싱싱한 반란처럼 혹은 독풀처럼첫번째 소나무도 아마 발내렸을 것이다우와아 함성속에 빈들을 채우며30대의 숲은 이루었을 것이다윗가지 솔잎 무성한 아래벗은 종아리 나란한 걸 보면우리네 20대가 또한 저랬던가 싶다얼키듯 설키듯 쓰러질 듯
봄1김태숙 기자 봄볕에 아무데나 트는 싹을 보면저나라 꽃순되어 떠난 할머니 생각지금쯤 무덤위에 쑥이나 질경이무성하고 무성할지금쯤 할머니 젖무덤위엔송알송알 밥풀같은 밥풀꽃 피어땅속 배고픈 어린 짐승들에게일어나 앉아 젖물리고 있을 생각봄날 아파트 베란다신문지에 돌돌 말린 마른 파뿌리 가랭이에탐스런 저승꽃대궁 파꽃이 한 줌아파트 16층 이 높은 이승에서 보니미개
공감(共感)김태숙 기자며칠째 그방에는 들어가지 못한다문간방 감자를 어쩌지 못한다물에 잠긴 아랫도리에 뿌리를 내고마른 몸통위에 묵직한 순을 내며암수한몸처럼 단숨에 세상을 포획하더니배꼽에 열을 뿜으며 싹머리를 내밀 때 감자는뱃가죽에 살이 얼마나 트던지터지도록 물을 먹고 있었다아랫도리 가득 대기중인 생명들이일시에 다닥다닥 싹을 틔우자제 한몸 지탱못해 새파랗게 숨
겨울철새의 북상김태숙 기자설거지통 수도꼭지를 여는 순간“겨울철새가 북상을 시작했습니다”뉴스방영중인 TV화면을쨍- 가르고등지고 선 내 척추로부터앞가슴 살점을 단숨에 가르고피 한방울 없이 겨울이아주 갑니다 저새등에 실려몇년째이곳에서 겨울새를 보냈는지세월가는 멀미증에 살저리는 꿈만이렇게설거지처럼 남아 물을 맞는지황황한 마음 한 곳 식구들 몰래북극행 대기석을 꼬옥
아침 김태숙 기자 드문 햇살로 창틀구석에는 작은 물구덩 하나 마르지 못하고 있었다 어슴프레 잠이 깬 새벽 미미한 어둠 밖에서 밤새 언 눈발 하나 거기 떨어져 포르르 몸 풀며 사그라드는 소리 하나 둘 셋 넷 점점 빨리 와 숨거두고 저엄 점 멀리 유골 날리는 소리 귓속에서 세상가득 내려앉는 소리 소리에 울린 하루가 결연히 일어난다 풀무더기 엉긴 황량한 언덕엔
돌아온 날 김태숙 차장 마음 무심히 떠났다 온 뒤 떠나 구중구천을 어설피 떠돌다 온 뒤에도 늦가을 토요일 오후 남산놀이터에는 있어온 것들이 전처럼 있다. 가지 휜 나무들 내려앉은 햇살 그 아래 단풍 젖어 환한 잎도 찬물로 오래오래 씻어낸 듯 가득한 한기 사이에 조용조용 피어오르는 산것들의 온기 그들 사이 있던 거리가 다만 고요해졌다. 이따금 묘지옆에 앉아
감나무 아랫마을 김태숙 기자 하늘 높고 까치발 선 저녁달도 그렇게 높아 시린 창공이 낮은 집 발치까지 내려온 마을 불끄고 방안에 드러누우면 밤하늘이 새벽강처럼 가슴 푸르게 흘러들고 구름도 달을 스쳐 미련없이 흐르는 곳. 바람에 문 닫으면 밤거미 집짓는 소리 도로 문을 열고 거미줄 받쳐든 감나무 벗은 어깨가 시린 내 등도 와 구들목대신 받치고 가는 듯한데 아
강의 노래 김태숙 산과 강이 한몸이 되는 걸 본 일이 없습니다 산이 더러 제 마음 실어 꽃잎 흘려보내고 더러는 애처로이 강물이 되려 제 몸 흐르는 물 위에 뉘어도 보지만 산 그늘에 덮인 강의 마음 한구석이 또 얼마나 쓸쓸한가 산은 모릅니다. 산이 앉은 언저리를 돌며 강물이 제 길 잃지 않고 강물 잦아드는 잔 구비구비에 산허리 마르지 않고 풀잎도 젖어가지만
잔 디 김태숙 기자 잠시 쉬고 싶었지 쉬다가 조금은 머물고도 싶었고 머물다가 아주 눌러살고 싶었지 땅의 단내에 취했던 거야 그러나 시시때때 비는 내렸고 요즘처럼 시시때때 비 내리는 한 멈출 수 없는 일이 떠나는 일이요 떠날 수 있다는 건 살아있다는 거지 그렇게 두세 고비 발을 묻었다 떠나왔네. 뿌리는 단 한번 내린다고 자네는 말하나? 떠나오면서 내 손으로
배 한척 김태숙 기자 바다에 이를 날 있으리라 기근에 타고 타서 말라붙은 물줄기와 생의 바닥에 맨살 대고 누운 배 한척, 목타서 하늘아래 입다문 것 모두. 흘러갔다 푸르게 제자리에 와 노래처럼 호흡처럼 다시 흔들릴 날 있으리라 설령 그것이 또 진통의 너울 속에 얼기설기 몸을 섞는 일이라 해도 지금은 다만 침묵할 때 침묵하며 다만 기다림을 배울 때 흘러온 물
물살 밀려드는 일이 한때는 김태숙 기자 물살 밀려드는 일이 한때는 제풀에 제몸 뒤척이는 바다의 일인 줄만 알았네 그러나 오늘 바다의 긴 꿈 따라 달리며 아서라 아서라 성난 열정 수습해 뭍으로 밀어내는 바람의 땀 젖은 등이 보이네 바다의 가슴에 품은 꿈을 버리라고 해일이 되지 못한 꿈조각들이 명치 끝에서 쏟아져 모래밭에 버려지네 바람이 이르네 한탄하지 말라고
하 늘 김태숙 기자 그대의 눈은 끝없이 맑고 깊어서 걸어도 걸어도 세상은 그 눈 속이다. 목공소 마당 미류나무 위에는 방금 구름 건너 돌아온 까치가 둥지를 틀고 참새 두마리 따라와 넘보다 일을 깨닫고 총총히 돌아가는 한나절 그대 속눈썹 끝에 바람이 돌아 잎새들 잠시 흔들리다 말면 세상 모든 나무들 안에서 안으로 그침없이 맴맴도는 바람의 정적 하늘은 도로 씻
바다 김태숙 기자 떠남의 뜻을 알게 했지 노여움이 흐르던 아버지의 손등 돌아나오면서도 나는 그 힘줄 속으로 흘러들고 있었지 오래 부유물질 덮일수록 안으로 푸르러지는 바다 옥죄는 고통으로 소금기처럼 싱싱해지는 상처 아버지 손등에서 푸른바다가 고요해진 날 파도 한무리 벼랑끝에서 또 한번 파열되겠지.
잠 김태숙 기자 사람들 엉겨 엉긴 숨소리 들으며 자는 일은 따뜻하다 어쩌면 서로가 서로에게 매달려 잠들 수 있는 일은. 그러나 어디 편편이 갈라 다 내 옆에 뉘어줄 수 없는 식솔들의 숨 칭얼거리는 불안한 잠 바라보며 어쩌면 서로가 서로에게 매달리지 못하고 허공중에 웅크린 잠은 무겁다. 내 사지에 목덜미에 매달려 잠든 잠들, 막무가내 기대오는 숨소리 들으며
무제 김태숙 기자 끝내 할 말을 다 못하는 것이 생이라지만 아무리 가슴속 헤집고 들어가봐도 사리같은 생의 열매 하나 못찾고 막막한 심연 검은 바다만 너울너울 그안에서 넘실대고 있더라지만 거기에 몸실을 말(語)하나 건져올리지 못하고 누워 넘친 눈물이나 귓볼에 가득 채우는 일이 또한 허무의 깨끗함이라지만 이른 저녁 까닭없이 남산에 올라 갖다 바칠 곳 없이 수런
밤과 아침사이 김태숙 기자 간밤 잠 짓누르던 시간의 무게는 어데로 가고 꿈을 접는 아침의 호수같은 고요 깃을 치고 기다려온 새 한마리 오늘 고요 가르며 무거운 하늘로 비상을 하고 빈 둥지의 가벼움으로 낙화한 꽃잎 무수히 갈 곳 묻지 않는 바람에 실려 떠나고
저 산 앞가슴에 김태숙 저 산 앞가슴에 쏟아져내린 이는 누구였을까 낮은 구릉끼리 낮은 어깨 맞대고 찬사람 사람들 등시린 바람 제 등에 대힌 맞고 사는 저산 앞가슴에 물살이 누웠다 간 모랫벌에 남아있는 힘줄의 흔적처럼 구릉사이 굽이치며 저산 앞가슴 모질게 허물고 간 격정의 그림자는, 굽이치고 굽이치며 저 산자락 마을로 이끌고 내려온 이는, 내려와 하마 먼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