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성면 봉소리가 고향인 나는 32년 5개월 동안 충남도 내 지역에서 교직생활을 했다. 당진에서는 당진중학교와 면천중학교, 합덕농고(현 합덕제철고) 등에서 근무했다. 오랜시간 동안 교직생활을 한 만큼 제자들 또는 동료들과 찍은 사진이 참 많다. 나는 사진을 잘 보관하고 있다.미술학과 교수인 둘째 아들과 함께 그 동안 찍은 사진을 앨범으로 만들기도 했다. 앨범 군데군데에 있는 아들이 그린 그림과 메시지는 앨범을 보는 데 재미를 더한다.나는 사진 뿐만 아니라 옛 물건도 버리지 않고 잘 모은다. 교직생활을 하면서 받은 봉급봉투를 아직도 갖
6년 전 이사를 하면서 하나의 방을 사진으로 채웠다. 이렇게 방을 꾸미고도 남은 사진앨범이 5~6권이다. 결혼 후 아내와 찍은 사진, 여행 사진, 아들 사진 등 참 다양하다. 여행을 다녀오면 사진은 물론, 언제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여행을 기록한다. 그래서 여행기록지도 몇 권이다.요즘 나는 셀카봉을 갖고 다닌다. 자전거 타는 것이 취미인 나는 자전거를 타고 달리면서 예쁜 꽃을 볼 때면 사진으로 남긴다. 항상 내 배낭에는 셀카봉이 꼭 들어있다. 이제 나에게 셀카봉은 없으면 안 될 필수품이다. 첫 번째 사진은 나와 아내
>> 이계영 정미면 천의1리 경로당 노인회장은·1937년 생(현 81세) ·정미면 천의리 출생 ·천의초 졸업·천의우체국 근무(1966~1999) ·현 정미면 천의1리 경로당 노인회장 옛 사진을 보면 지금의 나와 젊은 시절의 나는 참 변한 것 같다. 마음도 몸도 다 변했다. 살면서 사진을 찍을 여유가 없었는데도 그동안 찍은 사진을 보니 많더라.나는 올해 1월 1일자로 정미면 천의1리 경로당 노인회장직을 2019년까지 맡게 됐다. 천의1리 경로당은 총 100명의 노인들이 사용하고 있다. 경로당의 건물은 박영일 이장이 예쁘
집에 사진이 굉장히 많다. 스마트폰에도 약 700장의 사진이 보관돼 있다. 요즘엔 스마트폰의 기능이 좋아져, 사진도 스마트폰으로 찍고 전송해준다. 또한 좋은 글이 있으면 보내주기도 한다.일부러 사진을 많이 찍으려고 한건 아니지만 영원히 남는 것은 사진 뿐이다. 옛 사진을 보면 당시의 추억이 떠오른다. 기막힌 사진들도 많다. 특히 20여 년 이상 된 사진을 보면 과거와 현재를 비교해 볼 수 있다. 첫 번째 사진은 1972년 음력 10월 24일 결혼식 할 때 찍은 사진이다. 결혼식은 현재 다니고 있는 전도그리스도교회에서
고조부모님 때부터 정미면 수당리에 터를 잡았다고 한다. 그래서 정미면 수당리에는 나와 같은 함평 정씨의 종씨들이 많다. 하지만 지금은 남아 있는 친척들이 많지 않다.나는 2000년부터 13년간 마을 일을 도왔다. 힘든 날도 많았지만 보람을 느끼며 봉사해왔다. 정미면 내 18개의 마을 중 수당리가 우리마을사랑운동으로 화합이 잘 돼 상과 상금을 받은 적도 있다. 상금으로 마을 어르신들과 효도관광을 다녀오기도 했다. 수당리가 좋은 마을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수당리 주민들이 화합이 잘 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주민들과 다함께 똘똘 뭉쳐
나는 대호지면 두산리 아늑한 시골마을에서 자랐다. 27년간 당진에서 지내다 보따리 하나 메고 인천으로 올라왔다. 그 해 3월, 원목을 나르다 큰 사고를 당해 죽음의 문턱에 서기도 했다. 1년의 병원생활로 몸도 마음도 지쳤지만, ‘할 수 있다’는 각오 끝에 삼환운수와 삼환교통을 설립하고 인천시 남동구의회 의장까지 역임했다. 나는 젊은이들에게 어려움이 있어도 끝까지 용기를 잃지 않고 노력하면 큰 꿈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전하고 싶다. 첫 번째 사진은 뜨거운 뙤약볕이 내리 쬐는 여름날 찍은 사진이다. 이 날은 아내를 부
오랜만에 사진을 통해 패기 넘치던 젊은 시절을 되돌아봤다. 먹고 살기 어려웠던 시간을 거쳐 열심히 살아온 내 모습을 보니 대견스럽고 뿌듯하다. 카메라가 보편화된 지 불과 몇 년이 되지 않았다. 내가 어렸을 적엔 사진은 무척 귀했다. 때문에 내 어렸을 적 사진은 한 장 뿐이다. 그래서 나는 가족들과 사진을 많이 찍으려고 한다. 첫 번째 사진은 유일하게 보관하고 있는 어렸을 적 사진이다. 당시엔 카메라가 귀했다. 그래서 우리는 사진사가 집을 방문했을 때 기록을 남겼다. 이 사진도 사진사가 찍어준 사진이라고 아버지께서 말씀
경주가 고향인 나는 포항에서 지내다 남편을 만나 당진으로 오게 됐다. 현재 나는 대한적십자사 당진2동 봉사회 회장을 맡아 활동하고 있다. 더운 여름에 땀 흘리며 삼계탕을 끓이거나 한파 속 추위에 떨며 봉사를 하다 보면 지치고 힘들기 마련이다. 하지만 ‘고맙다’는 말 한마디에 다시 힘이 나곤 한다. 봉사는 내게 있어 활력소다. 하지만 고향에 계신 어머니는 보살펴 드리지 못하는 것 같아 항상 죄송스러움이 남아 있다. 첫 번째 사진은 지난 2012년 여름, 아들과 며느리와 함께 전남 담양으로 여행을 갔을 때 찍은 사진이다.
석문면은 내가 태어나고 지금까지 살고 있는 곳이다. 석문초등학교를 졸업해 석문농협 전무가 되기까지 석문면을 떠나지 않았다. 석문농협과의 인연은 농협 설립 초창기부터다. 지인의 권유에 스무 살 중반부터 잔심부름 일을 해 왔다.지금까지 일하며 어렵고 힘들었던 순간도 많았다. 그때마다 꿋꿋이 참고 견뎠다. 내가 부족하다는 생각에 다른 사람들이 싫어할 만한 일도 도맡아 하곤 했다. 늦은 시간은 물론 주말도 출근했다. 그래서 지금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시간을 같이 보내지 못한 가족에게는 미안함이 앞선다.
바다와 가까이 있는 대천이 나의 고향이다. 한의사였던 아버지는 우리가락을 좋아하셨다.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나도 어렸을 때부터 시조와 노랫가락을 듣고 자랐고 자연스레 우리가락과 친해졌다.그동안 나는 평범한 주부로만 생활해왔다. 전에는 여성들의 사회활동이 어려웠다. 하지만 시대가 변해 나 또한 사회에 나가 국악을 시작해야 겠다고 결심했다. 초창기에는 차태원 선생님과 남은혜 명창에게 소리를 배웠고 이후 중앙대학교 국악교육원에 입학해 본격적으로 국악을 공부했다. 당진은 남편의 직장을 따라 오게 됐다.그 후 지금까지 20년 넘게 당진에 살
나는 고대면 진관리에서 일제강점기 에 태어났다. 어릴 적에는 아버지가 일제 징용으로 붙잡혀 갔다. 당시 도망가다시피 어머니와 서산으로 떠나 약 30년 간 살았다.젊었을 때 생활고에 시달렸다. 그래서 돈을 벌고자 아내와 아들과 상경했다. 아무것도 없이 시작한 서울 생활이 너무 힘들었다. 5년간 채소를 판매하며 살다가 큰 아버지를 모시고자 당진을 다시 찾았다.이 자리를 빌어 50년 이상을 함께한 아내(김형예)에게 젊은날 고생시켜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첫 번째 사진은 17년 전 둘째 아들인 인정이가 대학교를
나는 예산에서 태어나 17살에 상경했다. 이후 투잡은 기본이고 여러 일을 동시에 하며 생활했다. 어려운 형편에도 열심히 살았다. 그덕에 지금은 하고 싶은 색소폰 연주를 원없이 할 수 있게 됐다. 나는 평일에는 당진에서 색소폰 연주 강의를 하고 주말에는 분당에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번 기회로 그동안 찍어놓은 사진을 찾아봤는데, 대부분이 색소폰을 들고 있는 사진 뿐이다. 지금도 색소폰 매력에 푹 빠져있는데, 10년 전에도 나는 색소폰 뿐이었나 보다. 첫 번째 사진은 1985년 신혼여행을 가서 찍은 사진이다.
여러 번 사진을 정리했는데도 사진이 상당히 많다. 특히 39년 동안 교직에 있었던 터라 그 당시 사진이 많았다. 앨범만 3권이다. 이 많은 사진들 중에서 감동적이고 아끼는 사진을 선정해 갖고 나왔다. 이제는 사진과 책들을 정리할 때인 것 같다. 첫 번째 사진은 1961년 공주사립대학부속고등학교에 다닐 당시 친구들과 찍은 사진이다. 외지로 공부하러 가기 어려운 시절에 아버지까지 일찍 여의었지만 어머니와 10살 많은 형님이 지원을 해줬기에 공주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됐다. 사진속 6명은 한 하숙집에서 함께 생활했다. 2인 1실이었던 방에
명절 때 친척들이 모일 때만 앨범을 꺼내 보곤 했다. 요즘에는 스마트폰으로 쉽게 사진을 찍고 저장할 수 있다 보니 1년에 한 두번 보는 앨범도 펴보지 않게 되더라.나는 현재 원당동에서 월드공인중개사를 운영하고 있다. 젊었을 때는 건설업에 종사했다. 그때는 쓰러질 정도로 일했다. 이후 건강이 악화되면서 회복을 위해 등산을 시작했다. 그리고 평생 살면서 내가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을 해보자는 생각에 음악을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동요대회에도 참가하고 기타를 연주하곤 했던 나는 3년 전 기타를 다시 잡았다. 레슨도 받고 독학도 했다. 나에
나는 안양에서 태어났다. 그동안 해보지 않은 장사가 없을 정도로 다양한 시도를 해 왔다. 타이어매장, 식당, 당구장, 구멍가게 등 현재는 고대초등학교 학생 지킴이 봉사를 하고 있다. 초등학생들의 등·하교길을 돕고 있는데 지킴이 근무일정에 내 하루 일과를 맞춘다. 지킴이 봉사를 하면서 아이들의 등하굣길 지도를 돕고 있으니 술을 먹거나 놀 수 없기에 내 건강도 저절로 챙겨지는 셈이다. 아이들을 위해 봉사하면서 내 건강도 챙길 수 있어 좋다.사진을 찾으면서 잠시 추억에 잠겼다. 아내와 함께 사진을 찾아보면서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이전에
서산시 운산면에서 태어난 나는 일찍이 상경해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이후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농림부에서 30년 , 농촌진흥청에서 7년을 근무했다. 수원, 안양, 천안, 대관령 등 여러 지역에서 직장생활을 했기에 가족들과 떨어져 생활했다.2008년에 퇴직한 후, 현재는 당진향교에서 유림으로 활동하며 경전을 배우고 있다. 또한 해나루시민학교에서 중등교육을 받는 학생들에게 한문도 가르치고 마지막 하루일과는 남송서도회 서실에서 붓글씨를 쓰며 삶을 보내고 있다.오랜만에 앨범을 찾아봤다. 사진을 찾는 동안 지난 세월을 돌아보게 됐다.
나는 강원도 고성에서 태어났다. 19살의 어린 나이에 웨이터 일을 시작했다. 이후 1990년에는 영화 시나리오를 써서 서울로 향하기도 했다. 주변의 권유로 탤런트 시험을 준비한 적도 있었다. 이 외에도 군고구마 장사도 해봤고 한 때는 다단계에 빠지는 일도 있었다.아내와 결혼하고 처갓집이 있는 당진으로 내려와 살고 있다. 결혼 후 사업이 잘 풀리지 않아 힘들 때도 있었지만 옆에서 힘이 돼 준 아내와 토끼 같은 자식들이 있어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지금은 콩나물국밥집을 운영하고 있다. 가게를 운영하면서 어려운 점이 많지만 험한 일을
나는 천안에서 태어났다. 1981년 보령 출신의 아내와 결혼하면서 당진에 오게 됐다. 데이트장소로 탁구장을 자주 찾았던 우리 부부는 5년 연애 끝에 결혼했다. 이후 신평중학교에서 체육교사로 활동하다가 지난 2012년에 명예퇴직을 했다. 지금은 아내와 함께 신평요양센터를 운영하면서 노후를 보내고 있다.신평요양센터를 운영하기 전 아내는 신평시장에서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들의 일상생활을 돕는 방문 요양보호사로 활동했다. 노인요양 분야에서 7년 간 경력을 쌓고 센터장 자격을 얻은 뒤, 지금은 신평에서 요양센터를 운영하고 있다.오랜만에 옛 사
나는 충청북도 옥천에서 태어났다. 당진은 33세의 나이에 아내와 백년가약을 맺으면서 오게 됐다. 나의 어렸을 때 꿈은 장군이었다. 경영학을 전공했지만 어릴 적 꿈을 실현하기 위해 ROTC장교로 7년간 근무했다. 이후 제대를 앞두고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고자 사회에 나와 전공과는 다른 인쇄출판업에 뛰어들었다. 현재는 인쇄출판업 원커뮤니케이션 대표로 있으며 (주)종합건설나무나라에서 영업이사로도 활동하고 있다.또한 나는 당진에 거주하는 충북 사람들의 모임인 충북향우회를 시작으로 ROTC 31기 총동기회 사무총장과 ROTC중앙회 친목분과위
나는 송악읍 가교1리에서 태어났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동네 어르신들에게 농사일을 배우며 자랐다. 성인이 되고 서울에서 8년 정도 직장생활을 했다. 그리곤 다시 당진으로 내려와 지금까지 농사일을 하고 있다. 올해로 79세지만 농사일은 즐겁다.오랜만에 서랍 속에 묵혀있던 앨범을 꺼냈다. 우리 가족뿐만 아니라 처제 결혼사진, 동네 사람 사진 등 다양한 사진들이 있었다. 양이 엄청나다. 사진을 보면서 옛 추억이 떠올랐다. 생각해보니 참 재미있었던 일이 많았다. 첫 번째 사진은 나와 내 아내 홍종길 여사, 큰 아들 천석이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