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진시대는 나날이 발전하고 있어요. 지역소식을 전해주는 역할은 물론 지역주민들의 대화거리가 되는 말벗 같은 존재에요.”노년학 박사인 김귀자 합덕대건노인대학 교학부장은 호스피스 자원봉사자로 30여 년을 살았다. 1989년 불과 1년 동안 어머니와 아버지, 남편의 죽음을 겪으면서 그의 인생이 완전히 달라졌다. 무상한 삶에 대한 고민이 이어졌고,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된 그는 삶과 죽음에 관한 세미나를 들으며 웰다잉을 처음 접했고 호스피스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가톨릭 신자인 김귀자 교학부장은 종교모임에서 만난 당진사람이 호스피스 활동을
고대면 당진포리가 고향인 김영철 전 당진시양록협회장은 당진에서 줄곧 살다가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했다. 하지만 서울살이가 너무 힘들어 직장을 그만두고 자영업을 시작했으나 몇 번의 실패를 겪었다. 힘든 생활을 이어가던 중 대우에서 진행하는 리비아 해외취업자 모집공고가 그의 눈에 띄었다. 그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5년 동안 리비아로 건너가 열심히 일했다.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고향 당진이 그리워졌다. 고향에 돌아온 그는 리비아에서 알게 된 지인을 만나 그동안 모은 돈으로 사슴 5마리를 구입했다. 힘들게 모은 돈으로 시작한 사업이기에
행복한가정만들기운동본부 고영석 본부장은 고대면 항곡리에서 태어난 당진 토박이다. 그는 가정을 행복하게 만들자는 취지로 설립된 행복한가정만들기운동본부(이하 본부)를 운영하고 있다. 본부에서는 노인과 청소년에게 사랑의 찐빵을 무료로 배포하는 등 지역사회에 기여하는 봉사활동을 이어왔다. 고 본부장은 “지금처럼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 것”이라며 “시민들이 어려운 이웃에 대해 함께 고민하길 바란다”고 말했다.“현재 당진에 일자리가 많이 부족한 상태에요. 당진시는 경제문제에 관심을 갖고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야 합니다.
이정애 사랑샘미술심리상담센터장에게 당진시대는 반가운 소식이다. 지역에서 활동하면서 자연스럽게 당진시대를 접했다는 그는 “내 주변의 소식을 알기 위해서는 지역신문을 봐야 한다”며 지역신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당진시대 SNS를 통해서도 기사를 읽으며 이를 캡처해 주위에 전하기도 한단다.매주 월요일 아침이면 센터로 신문이 배달된다. 그는 센터에 당진시대를 비치해 센터를 방문한 사람들도 신문을 읽을 수 있도록 했다. 이 센터장은 “학부모 등 사람들이 대기하면서 신문을 읽곤 한다”면서 “사람들이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코너와 기삿거리가 많이
대동다숲아파트 상가에 위치한 초록나무미술교습소는 지난 2016년에 문 열었다. 다년간 미술 교습소, 학원, 어린이집을 운영했던 송명희 원장은 “이전에는 유아부터 초등생, 중고등학생도 가르쳤다”면서 “현재는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수업하고 있다”고 말했다.오랫동안 학생들을 지도해오면서 송 원장은 상담을 잘하는 선생님으로 소문났다. 무엇보다 그는 학생들을 지도할 때면 아이들의 마음에서 생각하려고 한다고. 송 원장은 “평소 아이들과 함께 있으면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에 집중했다”며 “아이들이 미술 선생님이 아니라 상담 선생님이라 할 정도였다
합덕읍 구양도는 당진과 예산군 신암면의 시·군 경계지역에 있는 마을이다. 이곳에는 현재 30여 가구 70여 명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구양도리 이장을 맡고 있는 현자섭 원장은 마을의 아름다움을 살리고 싶단다. 현 원장은 “주변에 삽교천이 흘러 아침·저녁이면 노을지는 풍경이 너무 아름답다”며 “이를 살려 마을을 활성화하고 싶다”고 강조했다.하천길에 이야기를 입히고, 마을회관을 게스트하우스처럼 꾸며 수익 창출을 꾀하는 등 활기찬 마을을 만드는 게 그의 꿈이다. 올 연말에는 마을회관에서 된장·청국장 등 장 담그기 활동을 할 계획이다.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났던 박평화 바르게살기운동 당진시협의회장은 젊은 시절 인천의 도매상 직원으로 일하다 23살의 나이로 당진에 돌아왔다. 운수업을 하며 가정을 꾸렸던 그는 당진교육지원청에서 운전기사를 채용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지원했다고. 이후 당진교육지원청과 서산교육지원청에서 교육장이 타고 다니는 관용차를 운전하게 됐다고.당진감리교회 교인이기도 한 박 회장은 운전기사를 그만둔 뒤 교회에서 복지사업으로 지난 2000년에 만들어진 사회복지법인 평안마을 설립을 도왔다. 그는 “구룡동에 평안마을을 짓고 인근 지역 노인요양시설에 있던 노인들
“송악읍에서 송악산은 자랑입니다. 송악읍주민자치회 마크에도 송악산을 상징하는 이미지가 들어가 있죠. 지역의 상징인 송악산에 철탑이 건설돼 있어 안타까운 마음이 큽니다.”4대째 송악읍 중흥리에서 살고 있다는 최창규 송악읍주민자치회장은 당진에서 10대 시절을 보내고 서울로 올라가 20~30대를 보냈다. 지난 1991년 33살이 되던 해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송악읍 중흥리에서 10여 년간 중흥건재를 운영했다. 당시엔 꽤 크게 건재상을 운영했지만 한보철강 부도 사태를 맞으며 타격을 입기도 했다고.최 회장은 사회봉사 활동에도 열심히 참여했다
정덕순 한국농어촌공사 노동조합 당진지부장의 가장 큰 관심사는 ‘봉사’와 ‘소외된 이웃’이다. 올해로 당진송악로타리클럽 활동 21년 차, 송악사랑회 활동 6년 차를 맞은 정 지부장은 “봉사를 하면서 독거노인, 차상위계층, 결혼이주여성, 북한이탈주민 등 우리 사회의 소외계층을 많이 만났다”면서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아프다”고 전했다.그는 자신이 속한 당진송악로타리클럽과 한국농어촌공사 당진지사를 연계해 송악읍 봉교리에서 사랑의 집수리 봉사를 실시했다. 또한 청소년에게 꿈과 희망을 줄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지원과 후원을 이어가고
“24년 전 안산에서 당진을 가려면 버스를 3~4번 갈아타야 했죠. 그 당시 당진은 버스가 다니는 길인데도 흙길이었어요. 길 옆으로는 풀이 자랐죠. 재밌던 것은 사투리였어요. 아이들 손을 잡고 시장 구경을 하면 주변에서 들려오는 시골 어르신들의 사투리가 너무 재밌었죠.”먹그림사랑회에 활동 중인 진미경 총무는 지난 1996년 남편의 직장으로 인해 아무런 연고 없는 당진에 왔다. 처음에는 시골살이가 익숙치 않아 적응이 어려워 당진을 떠나고 싶었지만 사람들을 사귀고 인연을 맺어가면서 이제는 떠날 수 없는 곳이 됐단다.당진이 제2의 고향이
박영래 송악읍체육회장에게 있어 이제 당진은 고향이나 마찬가지다. 지난 1982년 27살 젊은 나이에 서울에서 온 그는 34년간 송악고 교단에 섰다. 박 회장은 “정년퇴직 후 고향으로 갈까 고민했는데 당진에서 보낸 시간이 많은 만큼 쌓인 인연과 정이 깊었다”고 말했다. 이어 “교직을 퇴직할 때 수많은 제자들이 설악가든에서 은퇴식을 마련해주기도 했다”면서 “제자들의 마음이 고마웠고 가슴이 뭉클해 눈물이 났다”고 덧붙였다.현재 박 회장은 대학교에서 체육 관련 강의를 하고 있으며 지난 2019년부터는 송악읍체육회장 직을 맡고 있다. 박 회
당진을 상징하는 ‘학’을 따서 이름 붙인 학동인회가 올해로 창립 40주년을 맞는다.당진의 첫 미술단체인 학동인회 창립멤버인 이경숙 작가는 “학동인회가 창립된지 어느덧 4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는 것에 감회가 새롭다”면서 “오늘날처럼 당진의 미술이 발전하고 활성화된 데에는 학동인회가 큰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충북 영동군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란 이 화가는 시골에 대한 동경으로 합덕읍에 내려왔다. 상명여자대학교 사범대학 미술교육과를 졸업해 지난 1975년 서야중학교 미술교사로 교단에 선 그는 지난 2005년을 끝으로 28년 간의 교직
기지시줄다리기에는 단순한 힘겨루기를 넘어 나라의 평안과 안녕, 그리고 풍년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500년 전부터 시작된 기지시줄다리기는 한진 앞바다에 큰 해일이 닥쳐 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가 있었을 때, 이 지역을 지나던 한 학자가 제사를 지내고 줄을 당기면 재앙을 이겨낼 수 있다고 제언하면서 주민들이 줄을 다리기 시작했다는 것으로 그 유래가 알려져 있다.주민들은 이후 매 윤년마다 물아래(수하) 지역과 물위(수상) 지역 주민이 둘로 나뉘어 줄을 당기며 재앙을 극복해왔다고. 김덕주 기지시줄다리기 축제위원장은 “기지시줄다리기를
서예는 사상과 감정을 예술적으로 표현한다. 서예(書藝)라는 단어는 해방 이후 서예가 손재형 선생에 의해 시작됐다. 조선시대까지 ‘서(書)’로 불리던 이 단어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일본의 방식대로 ‘서도(書道)’라 불렸는데, 일본의 잔재를 지워버리자는 의미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서예’라는 단어가 일반화된 것이다.당진시서예협회는 지난 1989년 창립총회를 시작으로 발족한지 올해로 31년차를 맞는다. 故 홍락표 전 회장이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면서 현재 한상현 씨가 회장 직무대행을 맡고 있다. 한 회장은 “당진군이었던 당시 각 읍면에
스승의 칭찬 한 마디가 제자의 삶을 바꿔놓았다. 서진석 한국화가는 “‘잘 한다’면서 ‘미술을 해볼 생각 없느냐’의 선생님의 말에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부터 미술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고 말했다.또래보다 늦은 나이에 시작했기에 그는 부단히 달려야 했다. 오전 수업이 끝나면 오후엔 미술학원에 갔다. 공주시 유구읍 출신인 그는 동네에 입시학원이 없어 버스를 타고 마을 밖으로 나가야 했고 학원 수업이 끝나면 친척 집에서 자고 다시 돌아오는 삶을 반복했다. 얼마나 오랫동안 앉아서 그림을 그렸던지 나중에는 꼬리뼈가 아파 자리에서 일어
중학생 때부터 달리기 시작해 고등학교까지 육상을 전공했던 서동철 당진시육상연맹 회장은 “육상은 모든 운동의 기본이자 기초”라고 말한다. 하지만 국내에서 육상은 비인기 종목이다. 그는 “육상은 비인기 종목이어서 자녀가 육상을 하면 좋아하지 않는 부모들이 꽤 있다”며 안타까워했다.서 회장은 비단 육상뿐 아니라 비인기 종목에 당진시대가 더욱 관심을 가져주길 바란다는 마음을 전했다. 그는 “인기 스포츠 종목은 어느 매체에서든 정보를 접하기 쉽지만 비인기 종목은 그렇지 않다”며 “시민들이 비인기 종목에도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관심가져 달
이영호 호서건설/호서중기 대표는 면천면 대치리에서 자란 당진 토박이다. 남산초등학교, 면천중학교를 졸업한 그는 타 지역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며 일찍 객지생활을 시작했다.지난 1988년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장비기사로 일하다, 1991년 무렵 면천면 성상리에서 개인 사업체를 일궜다.면천 출신으로 고향에 봉사하고자 한 그는 지난 2007년에 발족한 면천사랑봉사회에 몸 담았다. 초대 사무국장을 맡았던 그는 현재에도 30여 명의 회원들과 함께 매달 5만 원씩 회비를 걷어, 독거노인 난방유 지원, 장학사업, 집수리 봉사 등의 활동을 이어오고
올해로 80세를 맞이한 정덕영 당진향교 전 전교는 원당리에서 8살 때까지 살다가 1950년대에 대호지면으로 터전을 옮겼다. 현재까지 70여 년간 대호지면 마중리에서 일생을 보낸 그는 “자모산 아래에 있는 마을은 다른 지역보다 민심과 자연경관이 좋다”며 “장수한 주민들도 많다”고 애정을 드러냈다. 이어 “현재까지 마을에서는 장례를 치르기 위해 만든 마을 조직인 ‘연반계’가 조직돼 활동한다”며 “마을에 초상이 나면 주민들이 협심해 초상집을 돕는다”고 말했다.한편 지난 1970년부터 당진군청에서 일한 그는 민원실, 문화공보실, 재무과,
이해성 한국연예예술인총연합회 당진지회 부회장은 송악읍 가학리 출신으로, 기지초등학교와 송악중·고등학교를 졸업한 당진 토박이다. 천안에서 잠시 객지 생활했던 그는 지난 1997년 IMF 외환위기를 겪기 2년여 전에 다시 고향으로 내려왔다. 고향에 돌아온 그는 식당을 운영했지만 곧 불어닥친 IMF 외환위기에 운영이 어려웠다고. 많은 우여곡절을 지나 현재는 어머니 임영지 여사의 뒤를 이어 지난 1992년 개업한 동진장 모텔을 운영하고 있다.적십자, 의용소방대, 주민자치회, 개발위원회, 송악중학교 총동문회, 기지시줄다리기 축제위원회, 청년
김윤주·김영주 현대해상 하이플래너는 지난 2018년 현대해상에 입사한 입사 동기다. 서울 출신의 김영주 하이플래너와 천안 출신의 김윤주 하이플래너는 출산 후 육아에 전념하다 2년 전부터 다시 일을 시작했다. 김영주 하이플래너는 “집에만 있다보니 무료해 일을 하고 싶었다”며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하는 게 즐겁다”고 말했다. 김윤주 하이플래너는 “순성면 봉소리에서 식당을 운영하다 식당을 접고 늦둥이를 낳아 길렀다”며 “육아를 하다가 다시 일을 시작했는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젊어진 기분이 든다”고 전했다.채운동에 거주하는 김윤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