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넘게 교사로 살아오면서 수많은 학생들을 가르쳤다. 시간이 지나 제자들을 우연히 만나면 ‘선생님이 나를 기억하실까’ 생각하지만, 이름을 얘기하면 거의 다 기억이 난다. 졸업 후 15년 뒤 받은 제자의 편지에 “선생님이 제 선생님이어서 너무 행복했다”고 쓰여있었다. 선생으로 살았던 게 참 보람되고 감사하면서도, 정말 좋은 선생님이었는지 교사로서의 내 삶을 다시 돌이켜보게 된다. 1. 1980년 2월, 호서중학교 졸업식 때 찍은 사진이다. 당시엔 꽃다발이 아니라 꽃목걸이를 졸업생들에게 줬는데, 담임선생님들께 꽃목걸이를 걸어드리고
- 1967년 김천 출생- 홍익대학원 동양학과 수료- 한국미술협회 회원- 전국전업미술작가협회· 충청전업미술작가협회 회원- 아름다운동행전 참여- 신평초·천의초· 고대지역아동센터 등 강사 활동사춘기 때 심하게 방황했다. 교도관 말단으로 시작해 서울교정청장으로 퇴임한 아버지(故 권태정)와, 재테크를 했던 어머니는 늘 바빴다. 막다른 선택까지 했던 나를 극복하게 해 준 건 아버지였다. 새벽마다 “산아”라고 부르며 나를 깨웠고 산으로 데리고 갔다. 산타고 내려오면 꼭 우동 한 그릇을 사주셨던 것이 생각난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는 “곧 여성
- 1942년 순성면 성북리 출생- 순성초 21회 졸업- 면천중 13회 졸업- 신성대 복지행정학과 08학번- 대한적십자사 당진지구협의회 초대회장- 해나루시민학교 교감 1. 나에게 귀한 옛 사진이 사진은 무려 60년도 더 된 1966년에 촬영한 사진이다. 나도 이 사진이 남아 있는 줄 몰랐다.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아는 언니의 소개로 적십자지사에서 일하게 됐다. 이 사진은 육군군인병원에서 일하던 중 봉천동으로 파견 나갔을 때 찍은 사진이다. 두 번째 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나다. 당시 봉천동은 서울에서 살기 어
나는 석문중 통정리 출신으로 석문초와 석문중을 졸업했다. 중학교 때 태권도와 육상을 했지만 대학교에 갈 생각으로 인문계 고등학교인 호서고(18회)에 입학했다. 하지만 현재 충남유도인회장을 맡고 있는 김영석 체육선생님이 체육시간에 유도하는 모습을 보고 나를 운동부로 영입했다. 때문에 용인대학교에 진학하는 등 운동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지금은 송산면 동곡리에 위치한 현대에비뉴에서 관리소장을 맡고 있다. 활동적인 성격이어서 일을 하면서도 체육회와 동문회 등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1. 유도를 시작한 이유이 사진은 고등학생 당시 경주
나는 1944년 송악읍 도원리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이곳에서 살고 있다. 나는 젊었을 때부터 춤과 노래를 좋아했다. 지금도 당진 곳곳에서 공연과 축제가 열릴 때면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무대 앞에서 춤추는 것을 좋아한다. 무대뿐만 아니라 가족들 앉혀 놓고 거실에 있는 노래방 기계로 공연하기도 한다. 춤과 노래를 좋아하는 나의 옷장에는 빨간 재킷, 초록 셔츠, 노란 구두, 빨간 넥타이 등 원색 옷들로 가득하다. 이제는 자식들도 적응해 당진에서 구하기 힘든 원색 양말을 서울에서 구입해 보내주고, 손자들까지 노란 재킷을 선물할 정도다. 춤추
·1937년 석문면 삼화2리 출생·공주사범대 졸업·전 우강초등학교장·전 호원노인대학장·석문노인대학장·전 당진시노인대학장협의회장나는 1937년 석문면 삼화2리에서 태어났다. 평생을 살아 온 삼화2리는 논의 바깥이라는 뜻으로 ‘외창’이라고 불렸다. 옛날에는 해상을 이용해 인천 사람들은 생필품을, 당진 사람들은 곡식을 서로 물물교환 했다고 한다. 그 곡식을 보관하던 창고가 동네 당제산에 있었다. 지금은 논이 됐지만 이전까지 모두 외창 일원이 바다였다.토박이로 살면서 동네의 많은 변화를 봤고, 또 다양한 곳에서 여러 활동을 해왔다. 그러면
나는 1941년 보령에서 태어나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60년 부여의 한 초등학교에서 교직생활을 시작했다. 군 입대 전까지 초등학교 교사를 하다가 전역 후 중등교사 검정고시를 거쳐 중·고등학교 음악교사로 근무했다. 이후 보령에서 38년 동안 교직 생활을 했다. 한편 1983년 고향이자 집성촌이었던 동네에 공군기지가 들어오면서 떠나야만 했다. 마침 완공된 대호방조제 덕분에 일가 80여 세대가 함께 이주했다. 이후 줄곧 당진에서 살고 있다. 78세를 맞은 나는 1년에 한 번씩 외국여행을 하는 꿈이 있다. 벌써 동남아, 유럽, 인도, 중
나는 1933년 용연2통과 용연3통의 경계에서 태어났다. 당시 용연리는 하나의 마을이었지만, 현재는 3개로 분통됐다. 굳이 구역을 나누자면 나는 용연3통에서 태어났고, 1970년대 초반 용연2통으로 이사 왔다. 당진을 벗어난 적이 없는 당진토박이로 이곳에서 소를 키우기도 하고 벼농사를 짓기도 했다. 나는 평생 농사꾼이었다. 지금도 자녀들과 함께 농사를 짓고 있다.옛날 사진을 보면 ‘참 많이 늙었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수줍은 산골소년이었던 나도 이젠 꽤 늙었다. 여생을 건강하게 살다가, 하늘나라로 평온하게 가고 싶다.
나는 송산면 동곡리 출신으로 유곡초와 송산중을 졸업했다. 고등학교와 대학교 시절에 잠시 타지에서 머물다가 고향 당진을 찾았다. 당진으로 내려올 때 누나들이 “시골이라서 장가 못 간다”며 오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잘 정착해 아내를 만나고 두 남매를 낳고 잘 살고 있다. 현재 송산을사랑하는사람들의모임을 비롯해 송산면체육회, 송산면개발위, 지속가능상생재단, 송산중 운영위, 유곡초등학교총동문회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송산은 내 고향이다. 고향이기에 지역 일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앞으로도 지역에서 봉사하며 살고 싶다. 1
최선필 행정2통 노인회장- 1944년 생 대덕동 출신- 당진초등학교(41회) 졸업- 무공수훈자회 장례선양단원- 행정2통 내건너경로당 회장 나는 대덕동에서 태어나 당진초등학교(41회)를 졸업하고 서울로 ‘유학’을 떠났다. 오랫동안 타지에서 지내다 10여 년 전 지금 살고 있는 행정2통에 터전을 마련했다. 그사이 당진은 많이 변했다. 과수원이었던 자리에 설악웨딩홀이 자리하고, 목조건물이었던 옛 당진초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다. 그래도 당진이 좋다. 고향이기도 하지만 서울과는 다른 평화로움이 좋다. 1. “슬프고도
나는 순성면 성북2리에서 나고 자랐다. 성북2리는 참 좋은 동네다. 뒤로는 아미산이 있고 앞으로는 함박산이 있다. 함박산은 동네 앞산인데 생각보다 꽤 높다. 내가 유동국민학교(현재 아미미술관)를 졸업했을 당시와 지금 성북2리는 큰 변화가 없다. 나는 3년 전 집을 새롭게 지었다. 타지에서 나가서 살고 있는 자녀들이 내가 없더라도 언제나 고향에 와서 쉬고 놀 수 있도록 집을 지었다. 혼자 있을 땐 집이 크게 느껴지지만 가족들이 오면 집이 가득 채워진다. 지금은 노인회장직을 내려놓고 노인대학도 다니고 귀촌한 셋째 딸과 사위에게 농사를
1980년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이후 입대했다. 군대를 제대한 뒤 서천군 장항읍사무소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했으며 고향(순성면 중방리)이 있는 당진으로는 1989년에 왔다. 고향이라 반가움도 잠시, 대호지면사무소로 발령받아 꽤 고생했다. 지금에야 도로 사정이 좋지만 당시에는 ‘울고 넘는 장정리’라고 불릴 정도로 장정리 고개가 높아 버스도 못 지나다녔다. 그래서 대조리를 거쳐 마중리를 돌아 꼬박 1시간 걸려 면사무소에 출근했다. 힘들었지만 재밌었던 추억이 떠오른다. 36년간의 공직생활을 마치고 오는 6월 퇴임을 앞두고 있다. 사진을 보니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해 보관하고 있는 옛 사진이 많다. 지금도 밀레산악회 회장을 맡아 한 달에 두 번씩 등산을 가는데, 그때마다 찍은 사진들을 모두 인화해 보관하고 있다. 평소엔 나이든 것을 못 느끼는데, 사진을 볼 때면 세월이 많이 흘렀다는 게 새삼스럽게 다가온다.요즘엔 등산을 하거나 놀러 다니는 게 재밌다. 3년 전에는 환갑으로, 올해는 결혼 40주년을 맞아 아내와 외국도 다녀왔다. 또 산악회를 통해 전국 산을 오가고, 마을 사람들과 함께 나들이도 다녀온다. 1. 힘들었던 3년 간의 복무 시절첫 번째 사진은 군대 가기 전 젊었을
내가 군 복무한 곳은 중부전선 최북단인 6.25 한국전쟁 당시 격전지 백마고지다. 현재 백마고지는 일명 열쇠부대인, 보병 제5사단인의 주둔 관할구역이다. 5사단은 내 젊은 시절 추억이 가득한 곳이다. 우리 사단은 “동작 그만!”이라는 말에 떨어지던 낙엽도 멈춘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군기가 강했던 곳이다. 초소에서 북한 군인들이 운동하는 모습까지 보일 정도로 북한과 인접했다. 비무장지대를 앞에 두고 철책을 지키는 업무기 때문에 군기가 강할 수밖에 없었다. 사진을 들춰보니 그때의 추억이 떠올랐다. 다시 한 번 부대를 가보고 싶지만 쉽지
어느덧 내년이면 아흔이다. 시간이 참 빠른 것 같다. 나는 송산면 유곡리 출신으로 사업 실패로 잠시 힘들었던 때가 있었다. 그러다 서울 신림동에 있는 패션회사에 55세에 취직했다. 어려웠던 때가 있었기에 회사생활을 정말 열심히 했다. 늘 아침 일찍 출근해 늦은 저녁에 퇴근했다. 나는 이 회사에서 70세 가까이 일했다. 회사에서는 다닐 수 있을 만큼 끝까지 다니라고 했지만, 갑자기 아파진 무릎 때문에 일을 그만뒀다. 그 후에 다시 고향으로 내려와 터를 잡았다. 1. 건강도 챙기
송악읍 중흥리에서 태어난 나는 가학리와 석포리에서 자랐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당진농협에 취직해서 고향을 떠나지 않고 35년간 근무했다. 정든 직장을 떠나 주택관리사 자격증을 취득해 현재는 신평의 공간목련아파트 관리사무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1. 나의 은사님, 김영기 담임 선생님나는 송악초와 송악중, 당진상고를 졸업했다. 첫 번째 사진은 고등학교 3학년 시절에 담임선생님(김영기)과 찍었던 사진이다. 나의 마지막 담임선생님인 그는 인자한 성품을 가진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이 아직까지도 당진에 살고
고대면 진관리에서 태어난 나는 젊었을 때 직장생활을 하면서 농사도 지었다. 그러다 26세 초반 월남전에 참전했다. 참 치열했다. 눈 앞 1m 전방에 포탄이 떨어지는 것을 경험하기도 했다. 다행히 땅에 엎드려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그래도 어깨와 등, 팔에 포탄 파편을 맞아 정신을 잃었다. 당시 헬리콥터로 이송했다고 하는데 전혀 기억이 없다. 그 후 한 달 간은 귀가 아예 들리지 않았다. 이 때문인지 지금도 귀가 잘 안들린다. 젊었던 그 때는 죽음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전쟁터를 뛰어다녔다. 하지만 이제 나이가 드니 죽음이 겁나기
제가 면천초(45회)를 다녔을 땐 한 반에 60명이 넘고 전교생이 1500명에 가까웠어요. 폐교한 죽동초와 남산초도 당시 면천초의 분교였을 정도였죠. 하지만 지금은 전교생이 91명뿐이에요. 모교인 면천초에서 아동지킴이로 활동하는데, 과거 모습을 찾기 힘드네요. 조금은 안타깝기도 해요.저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갔어요. 배제중·고등학교를 다녔는데, 그때는 서울 정동 이화여고 옆에 위치해 있었어요. 사춘기 때 이화여고만 기웃거리지 않았으면 최소 연세대는 갔었을 거예요. 당시 기숙학원이 최초로 생겼을 때 단과반도 다니고 했어요.학교
구자경 송악농협 이사>>구자경 송악농협 이사는·1938년 송악읍 광명리 출생·전 송악읍 광명리 이장·현 송악농협 이사·현 송악읍 광명리 노인회장 나는 송악읍 광명리 토박이다. 6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외아들인 나는 집안의 가장역할을 도맡아 했다. 배움의 한이 남아서인지 시간이 날 때마다 수지침, 풍수지리 등을 조금씩 배우기 시작했다. 현재는 지역의 역사에 대해 공부도 하고 있다.나는 광명리에서 12년 동안 이장을 지냈다. 마을의 크고 작은 일을 도왔고, 올해부터 광명리 노인회장을 맡아 활동하고 있다. 광명리 노인회 총무만 18
나는 대호지면 장정리에서 나고 자랐다. 조금초, 당진중을 졸업했으며, 인천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26살 때 경찰공무원에 합격해 첫 발령을 서산으로 받았다. 이후 대전에 위치해 있었던 충남지방경찰청 감찰계와 정보계에서 근무했다. 임기를 마치고 33년 간의 경찰생활을 정리한 후 지난 2003년 고향인 당진을 찾았다. 현재는 농사를 지으며 바르게살기운동 대호지위원장과 대호지노인대학장을 맡고 있다. 나는 대호지면에 없던 노인대학을 지난 2016년 3월에 만들어 초대학장을 맡았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욕심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