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관광에서 사무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고미경 씨는 15년 전 당진에 내려와 송악읍에 터를 잡고 살고 있다. 그는 인천보다 여유가 있는 당진이 더 좋다고 말한다.미경 씨는 “당진시대 사진속으로 추억속으로 인터뷰 덕에 오랜만에 앨범을 펼쳐보게 됐다”며 “이번 기회에 사진을 정리했다”고 말했다.사진을 찾으면서 사진 속 추억을 되새김하는데 미경 씨의 아들 재희 군이 미경 씨 부부의 젊은 시절 사진을 보고 놀랐다고. “우리아빠 젊었을 때 잘생겼구나”라는 아들 재희 군의 말에 미경 씨 부부는 한참을 웃었다고 말했다. 첫 번째 사진은 1990년
한화손해보험 신성대리점·서산지점 김정환 대표는 석문면 삼봉리에서 태어나 지금껏 살고 있다. 김 대표는 삼봉어린이집 원장인 큰딸을 도와 원아들의 등·하원을 돕고 있으며 삼봉어린이집 옆에 민예품 박물관 개장을 준비하고 있다.사진 찍기가 취미인 김 대표는 그동안 찍은 사진을 큰 액자에 보관해 놓을 뿐만 아니라 왜목마을에서 찍은 일출사진을 액자에 넣어 소중한 사람들에게 선물한다. 그는 “인생에 남는 것은 사진 뿐”이라며 “내 카메라에 식구들과 더불어 더 많은 사람들이 기록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첫 번째 사진은 아내와
김근화 대표는 현재 구 터미널 인근에서 SK텔레콤 당진중앙대리점을 운영하고 있다. 또한 당진 와이즈멘 , 당진 YMCA에서 봉사활동을 해왔으며 현재 국제와이즈멘 한국서부지구 충남북서지방 새당진클럽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김 대표는 “그동안 찍은 사진들을 볼 때마다 참 재밌게 살아왔구나 생각이 든다”며 “자녀들의 성장 모습과 나의 성장을 오랜만에 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옛날에 송산면에서 사진관을 운영했던 나는 항상 찍어주는 입장이었기에 내가 찍힌 사진을 고르는게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 첫 번째 사진은 1979년도 결혼식
지난날 밤, 고이 놓아둔 앨범을 찾았다. 사진을 한 장 한 장 찾을 때마다 사진 속 나의 모습에 그 당시 추억이 떠올랐다. 재미난 사진들이 참 많더라. 사진을 보는 동안 옛 추억에 빠졌다. 첫 번째 사진은 내가 돌 때 부모님과 찍은 사진이다. 나는 7남매 중 독자다. 위로 6명의 누님들이 있고 나는 막내아들이다. 당시 어머니 나이 40세에 나를 낳으셨다. 늦둥이로 태어난 나는 온 가족의 귀여움을 받으며 자랐다. 큰 누님과 나는 무려 17살 차이가 났다. 여섯 누님들은 나를 금이야 옥이야 보살펴줬다. 그래서 누님들한테 미안할 정도다.
>> 당진전통시장 내 우리식품을 1994년부터 21년간 운영하고 있는 하 대표는 고대면 성산리 출신으로 28세의 젊은 나이에 농업후계자 및 새마을지도자로 활동했다. 하 대표는 앨범에서 사진을 한장 한장 꺼내며 옛 기억을 되짚었다. 하 대표는 “농업에 종사한다고 하던 일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왔을 당시와 젊었을 때 꿈 많던 지난날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고 말했다. 첫 번째 사진은 26세 때 집 앞 텃밭에서 찍은 사진이다. 당시 고향인 고대면 성산리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농사를 지었다.오이를 들고 있는 남자가 나고, 옆에 있는 사람이
미국과 일본에서 20여 년간 생활하다 2000년 초, 영구 귀국했다. 막상 귀국하니 내가 태어나 성장한 그 옛날 우리 동네(송산면) 모습이 아니어서 마음이 참 씁쓸했다. 이 시기에 지인 소개로 당진환경운동연합 회원으로 활동하게 됐다.이후 당진환경운동연합 집행위원장·감사, 충남관광협의회 회장, 당진 농촌체험 나들이협의회 회장, 금강유역환경청 환경 감시원, 현대제철 인근지역 환경대책위 사무국장 등 대외활동을 하다 보니 가정에 신경 쓰지 못해 ‘0’점가장으로 살아왔다. 우리 가족 특히, 나 하나만 바라보고 시집 온 사랑하는 아내 조연자에
옛날에 찍어놓은 사진을 찾으면서 ‘나에게도 이런 시절이 있었구나’하고 추억에 젖었다. 인생을 산다는 것은 물이 흐르는 것과 같다. 흐르는 물처럼 지나간 과거에 사로잡혀 후회하지 말고 앞으로 내가 좋아하는 노래와 일을 지금보다 더 열심히 해야겠다. 첫 번째 사진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절친한 친구 현자와 찍은 사진이다. 현자와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같이 다녔다. 현자는 아담하고 여성스러운 반면 나는 오빠가 두 명이나 있어서 털털하고 남성스러웠다. 지금 현자와는 연락이 닿지 않는다. 너무 아쉽고 참 보고 싶은 친구다. 현자야 잘 지내
살면서 느꼈던 아픔과 기쁨, 슬픔과 행복의 감정들은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레 아련한 추억으로 남는다. 오랜만에 옛 사진을 찾아보면서 행복한 시간에 젖어 들었다. 첫 번째 사진은 집안 형편이 어려워 옥수숫대로 담을 짓고 흙이나 돌을 쌓아 벽체를 만든 토담집에 살았을 때 찍은 사진이다. 중학교도 못 다닐 정도로 가난해서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직접 부모님을 찾아와 반드시 나를 중학교에 보내야 한다고 설득해주셨다. 그 은사님의 은혜를 잊을 수 없다. 그 시절 감사하는 마음으로 아직도 은사님께 안부인사를 전하고 있다. 두 번째 사진
대단한 일도, 큰 일도 하지 않은 내 사진들이 신문에 나오다니 쑥스럽다. 생업과 새마을협의회에 몸담아 일하면서 많은 고생을 했다. 그래도 지난 시간을 거슬러보니 행복했다. 옛날에는 사진 찍는 것을 안 좋아했는데 앨범을 넘기다 보니 지난 옛 기억에 괜히 뭉클하다. 첫 번째 사진은 1993년도에 제주도 용두암에서 찍은 사진이다. 친구의 신혼여행이었는데 친한 친구들과 부부동반으로 함께 갔다. 이때 우리 부부는 결혼 10년차였는데 친구는 이제 막 결혼한 신혼이었다. 사진을 보니 이때의 젊음이 가장 행복했었다. 젊은 내 모습이 참 ‘예쁘다.
얼마 만에 꺼낸 앨범인지 모르겠다. 옛 사진을 들여다보니 잊고 있었던 그 때의 기억들이 떠오른다. 지금 생각해보면 결혼하고 난 뒤 정말 바쁘게 지내온 것 같다. 결혼하기 전 아내(박종선)와 연애할 땐 매일 놀러 다니기 바빴고. 그리고 딸(윤희)과 아들(재성)을 연년생으로 낳고도 많이 놀러 다녔다. 요즘엔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어서 그런지 사진이 많이 남아있지 않아 아쉬운 마음이다. 첫 번째 사진은 우리 네 가족사진이다. 우린 딸과 아들을 어렵게 만났다. 딸(윤희)을 낳으려고 분만실에 들어갔는데 아이뿐만 아니라 산모의 목숨도 위험하다
사진을 찾기 위해 앨범을 뒤적거리며 내가 살아온 자취를 돌아보니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됐다. 지난 시간동안 사진을 찍어 앨범에 차곡차곡 모을 줄만 알았지 꺼내 보진 못했다.그동안 나는 송사모(송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사무국장 활동을 통해 지역 내 학생들과 주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작은도서관인 ‘송산개미도서관’을 유치해 지금까지 관리를 이어 왔다. 특히 지역 내 어린이집을 운영하며 아이들이 성인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봐 왔다. 나와 지역을 돌아보며 그동안 잊혀졌던 추억들을 다시 한 번 떠올리며 웃을 수 있었던 값진
내가 살고 있는 정미면 사관리는 고압 송전탑으로 인해 마을주민들의 걱정이 크다. 건강상의 문제는 물론 지가 하락으로 주민들이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정부시책으로 진행되는 사업이라지만 주민들에게 일방적인 피해만을 남기며 진행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아름답고 조용했던 마을이 송전탑으로 인해 파괴되는 모습에 안타까움을 감출 수 없다
예산군 광시면 출생인 나는 17세에 시집와 아직까지 석문면 삼봉리에서 살고 있다. 당시 “시집을 늦게 가면 일본 사람들이 잡아간다”는 집안 어르신들의 성화에 못 이겨 아버지께서 나를 시집 보낸 기억이난다. 아버지 역시 어린 나를 시집보내고 마음고생을 많이 하셨단다. 어머니 말로는 밤마다 “복순아~”라며 울음을 터트
석문면 장고항리에서 나고 자란 나는 군대를 제대한 뒤 10여 년간 인천에서 타지생활을 해왔다. 정들었던 고향으로 다시 내려와 장고항을 당진의 대표 관광지로 홍보하는 역할을 하고자 힘을 기울였다. 실치축제부터 바다낚시대회까지 당진은 물론 전국에 장고항을 알리는 역할에 충실했다고 자부한다. 아내의 생일도 챙겨주지 못하고 한달이 넘도록 귀가도 하지 못한 채 행사에 매달리는 일이 많았다. 그간의 노력 덕인지 두 축제는 이제 자리를 잡아 전국에 널리 알려져 있다. 첫 번째 사진은 장고항2리 청년회 발대식이 있던 2005년도 경의 사진이다.
지금은 절인 배추를 판매하는 사업이 전국적으로 자리 잡아 훌륭한 농가 소득사업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이 사업이 갈산리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1999년 갈산리 이장으로 활동하던 당시 배추가격이 폭락해 마을 농가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당시 배추 가격이 한 포기에 50~70원 정도였고 이 가격에도 구매를 원하는 사람들을 찾을 수 없었다.판로를 고민하던 중 어려운 이웃들에게 라면 및 쌀 등을 전달하는 영등포구청과 인연이 닿았다. 영등포구청에 농가도 살리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 김치를 전달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고
서예는 내게 긍지다. 서예인으로서 해를 거듭하며 한국 서단에서 일익을 담당해야 한다는 마음에 책임감이 컸다. 현재 한국의 서단은 전통적인 서예를 바탕으로 시대에 맞는 감각을 더하고 있다.변해가는 시대에 발맞춰 최근에는 당진지역 내 서예의 저변 확대를 위해 청소년 서예교육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새로운 세대에게 전통적인 서예를 가르치고 그들의 신선한 감각을 대입할 수 있도록 이끄는 게 서예의 저변 확대를 위한 길이 되리라 믿는다. 전통서예를 바탕으로 캘리그라피를 접목한 교육을 구상하고 있다. 첫 번째 사진은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서예
오직 차(茶) 마시는 일에만 정신을 집중하는 경지를 다선삼매(茶禪三昧)라고 한다. 한 잔의 차를 마심에도 선이 된다면 그 차향과 차맛에서 삶의 궁극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차를 마시는 것만으로도 사상이나 학문적 견해의 차이, 문화적 차이로 인한 반목 등과 같은 단단한 벽이 허물어져 차의 맛은 선이 되는 것이다. 이런 다도의 매력에 빠진 것은 약 20여
충주시가 고향인 나는 남편(이광수)을 중매로 만나 1989년에 결혼했다. 둘만의 신혼기간을 알콩달콩 보낸 뒤 1990년대 초반에 남편의 고향인 송악읍 중흥리에 정착했다. 당시 남편과 오래 연애한 것은 아니었지만 행동 하나하나가 어찌나 마음에 들던지 단번에 결혼을 결심할 정도였다. 그중에서 남편의 착한 마음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어느덧 20여 년의 세월이 훌쩍 넘어 중년이 된 우리지만 서로 사랑하고 아끼고 존중하는 마음은 아직도 변하지 않았다. 첫 번째 사진은 결혼식 때 남편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우리 모두 앳된 모습에 ‘이런 시절
바쁘게 살다보니 앨범을 거의 꺼내 본 적이 없었는데 오랜만에 사진을 보니 감회가 새롭다. 앨범 속 지난 날들이 있기에 현재가 소중하게 느껴진다. 현재가 있기에 지난 날들이 소중한 것처럼. 첫 번째 사진은 당진JC 41대 홍기후 회장의 이임식과 42대 회장인 내 취임식을 기념하는 사진이다. ‘새로 뜨는 위상! 도약하는 당진JC’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취임한 만큼 재임기간 동안 당진JC가 변화하는 시대에 발 맞춰 변화할 수 있는 사업을 발굴하기 위해 노력했다. 특히 당진의 미래를 이끌어 갈 청년 리더들을 육성하기 위해 많은 고민을 했다.
곧 추석이다. 우리는 추석에 온 가족이 모여 그동안 쌓였던 회포를 풀고 알콩달콩 소중한 추억에 대해 이야기하곤 한다. 가족들이란 누구에게나 큰 힘이 되는 버팀목이다. 가족이 있기에 현재의 내가 있을 수 있고, 앞으로의 나를 만들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사진은 친정 가족들과 어린 시절 찍은 사진이다.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나는(사진 가장 앞 왼쪽) 큰 오빠와 큰 언니의 자녀로 오해 받는 일이 종종 있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난 것도 이유였지만 형제자매 간 생김새가 많이 닮아 오해를 받기도 했다.오랜 세월이 흘러 각자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