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 퇴직 후 당진시 노인회장으로 활동여성부회장 제도 도입 및 경로당 활성화 보람 첫 번째 사진은 지난 2013년 노인회 회원들과 함께 중국 북경을 방문했을 때 찍은 사진이다. 우리가 방문하기 전날 당시 박근혜 대통령이 북경을 방문해서 배경에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다. 북경에서 태극기를 만나니 가슴이 벅찼다. 과거 사진을 찾아보니 예전의 추억들이 떠올랐다. 그동안 사진을 많이 찍어 놓지 않아 아쉽다. 과거에는 공무원으로 재직하며 송악면장으로 퇴임했다. 이후 대한노인회 당진시지회 취업지원센터장으로 7년 간 활동하다 지난 2010년부터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서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3세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이듬해 6.25전쟁이 일어나면서 할아버지를 따라 당진으로 이주했다. 당시 외가가 면천이었던 할아버지는 지주를 대신해 소작 관리를 맡았다.아내(전선옥)를 만나 결혼하고 8남매(3남 5녀)를 낳아 길렀다. 그리고 평생 농사일을 하면서 지역에 봉사하고자 했다. 1960년대에 이장으로 선출돼 마을 일을 돌봤고, 농촌지도소 면천면 지도사, 새마을지도자 면천면협의회장 등으로 활동했다.그리고 자개2리 노인회장도 맡았다. 옛 사진을 꺼내보니 새삼 ‘아, 이런 일
사진을 찾으면서 젊은 시절 스카프를 머리에 둘러맨 모습이 촌스러워 웃음이 나오기도 했고 돌아갈 수 없는 그리운 시절에 대한 향수에 눈물을 쏟기도 했다. 나는 공부가 하고 싶어 늦은 나이에 03학번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다양한 자격증 취득에 도전해왔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남자로 태어났으면 큰 일을 해냈을 거라고들 한다. 하지만 나는 지금 이 순간이 좋다. 양재학원 다니던 시절1966년 천의양재학원을 다닐 때 선생님과 학생들이 함께 찍은 사진이다. 당시 정미초등학교 옆에 천의양재학원이 위치해 있었다. 제일 뒷줄 왼쪽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적십자 활동에 뛰어들었다. 평생을 봉사해야 할 자리가 있으면 마다하지 않았던 건 늘 이웃과 더불어 사셨던 친정어머니를 많이 닮은 탓이다. 어려운 이웃들에게 내 힘과 시간을 나눴지만 얻은 보람이 더 크다. 그래서 혹자는 “봉사자는 남을 위해 일하는 게 아니라 나를 위해 일하는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말했던 걸까. 1. 이웃도 나도 모두 한 몸첫 번째 사진은 1978년도 삽교호에 자연환경 캠페인을 하러 나갔을 때다. 적십자의 전신인 ‘부녀봉사대’는 여성으로만 조직된 단체였다. 당시에는 지금의 노란 적
사진첩엔 잊고 살았던 내 삶의 흔적이 담겨 있다. 많은 이들을 만났고 많은 일들을 겪으며 살아온 세월은 화살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세월이 흘러 노인이 되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사진 속 모습은 변함없이 그대로다. 1. 나를 예뻐했던 은사님이화여대 법과대학 이태영 학과장(사진 중앙)의 생일을 맞아 함께 찍은 사진이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소장으로도 활동하던 은사님은 평소에 나(사진 뒷줄, 좌측 두 번째)를 예쁘게 봐주셨고 졸업 후 함께 일하기를 바라셨다.하지만 법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나는 1학년을 마치고 휴학했고 이후에도 은사님의 권
옛 사진들은 추억 속 그 날로 시계를 되돌려 놓는다. 사진을 보는 것은 잊고 지냈던 지난 날들의 기억을 되찾는 것이다. 뽀얗게 사진첩 위로 내려앉은 먼지들은 켜켜이 묵은 지난 세월을 말해준다. 옛 기억을 더듬어 보면 모든 순간이 참으로 소중했던 시간들이다. 1. 처갓집에 일손 돕던 매형이 사진은 둘째 매형의 사진이다. 매형이 누나(박영자)와 연애하던 시절 처가집인 우리 집에 잘보이기 위해 찾아와 일손을 도왔던 날이다. 누나는 송악중학교와 당진여고 배구부 주장으로 활동하며 육상 충청남도 대표선수로 활동할 정도로 운동신경
빛바랜 사진 속에 지나간 세월이 담겨 있다. 오래된 추억들이 사진으로 남아 긴 세월을 말해준다. 앨범 속 그리운 얼굴들이 떠오르고 옛 사진을 보며 추억에 잠긴다. 사진 한 장, 한 장에 담겨있는 모든 것이 인생의 한 페이지다. 1. 3살 때 찍은 사진 첫 번째 사진은 내가 세 살배기 적 찍은 사진이다. 나는 가운데 있는 아이로 할아버지 옆에 할머니가 날 안고 있다. 할머니 품에 안겨 사진 찍던 세 살 꼬마는 어느덧 나이 일흔의 할아버지가 됐다. 벌써 60여 년 전의 사진으로 세월의 흔적이 느껴진다. 2.
지난해 당진문화재단에서는 원도심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를 발간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이기도 하고 또 떠나기도 하면서 이야기를 만들어낸 원도심에 대해 당시 사진과 함께 지역의 원로 4명을 인터뷰해 구술을 채록한 사업이다. 누군가의 인생은 지역의 역사가 되기도 한다. 책 속에 잠들어 있기엔 아쉬운 이야기 중 일부를 발췌해 지면에 싣는다. 1934년에 태어난 이정진 씨는 7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오랜 세월 당진의 야권 정당의 실무자로 일했다. 이 씨에 따르면 군사정권이 이어졌
한충기 당진시의용소방대연합회장 (대호지면 조금리) 첫 번째 추억사진조금초등학교 6학년 때 대호지면 사성리 바닷가로 소풍 가서 찍은 사진이다. 50년이 넘었으니 갖고 있는 사진 중 가장 오래된 사진일 것이다. 당시 조선동 담임선생님(가운데)과 같은 반 친구인 (왼쪽부터)이동섭·정종명·손일표와 함께 찍었다. 나는 가장 오른쪽에 있다. 친구들이 사진 찍는 걸 옆에서 구경하고 있는 모습이 재밌다. 두 번째 추억사진14살 쯤 ‘마차’라 부르는 소달구지를 끌던 우리집 소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소가 어찌나 일을 잘했는지 하루 인
두 청춘이 꽃다운 20대에 만나 66년을 함께 살았다. 남편은 올해 아흔을 맞았고, 아내 또한 여든 다섯이다. 사진 속 훤칠한 청년과 젊은 새댁이 세월의 흐름 속에 어느덧 노인이 됐다. 돌이켜 보면 그때가 가장 좋았고, 즐거웠던 것 같다. 그게 좋은 줄도 몰랐는데. 허망하게 세월이 흘렀다. 1. 친정어머니(1번 사진)내(김영혜)가 5~6살쯤이었을 때 어머니, 남동생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80년의 세월이 고스란히 담겼다. 당시 아버지가 공무원이어서 큰 어려움 없이 자라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가세가 기울었다. 어머니
최장옥 석문우체국장 / 원복희 전 석문면부녀회장 무려 55년 전 사진이다. 고대면 슬항리에 위치한 옛 고향집 앞에서 가족들과 사진을 찍었다. 사진 맨 아래 꼬마녀석은 셋째동생(최장선 평택고용복지플러스센터 소장)이다. 어머니가 막내동생은 안아주고, 자신은 안아주지 않는다며 토라져서는 저렇게 사진을 찍었다. 지금도 보면 웃음이 나는 사진이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겠지만, 사진을 찍은 저곳은 지금의 당진종합운동장 자리에 있던 ‘고대방죽’이다. 엄청 큰 호수였는데, 저곳을 모두 매립해
박인규 전 우강면개발위원장-1954년 송악읍 도원리 출생-송악초·송악중 합덕농고(현 합덕제철고) 졸업-전 우강면 세류2리 이장-전 우강면이장협의회장-전 우강면개발위원장-전 우강면주민자치 위원 여전히 그리운 내 동생우강에서 일평생을 살았지만, 태어난 곳은 송악읍 도원리다. 중학교 3학년이었던 1970년도에 우강면 세류리로 이사왔다. 다니던 송악중학교를 졸업하기 위해 1년 동안은 큰아버지 댁에서 살면서 통학했다. 현재 살고 있는 곳이 당시 이사 왔던 바로 그 터다. 이 사진은 이사 직후 6남매(명규·인
지금은 머리가 하얗게 센 늙은 노인이지만, 꽃처럼 아름다웠던 시절이 있었다. 최병문 씨가 21살 때, 아내 인정복 씨가 19살일 때 결혼했다. 남자는 신평면 신송리에서 나고 자랐고, 여자는 우강면 송산리에서 태어났다. 그땐 어른들이 맺어주는 대로 서로 얼굴도 보지 못하고 결혼식을 올리던 시절이었다.“어른들끼리 사진을 주고받았는데 나는 안 보여 주는 거야. 감히 사진 좀 보여달라고 말도 못하던 시절이었지. 벽장 안에 숨겨 둔 사진을 내가 몰래 꺼내봤지. 괜찮더구만.” (아내 인정복 씨)결혼식 때 서로 맞절을 하면서 흘깃 쳐다본 게 처
마을 노인들의 사랑방 속사경로당38년 만에 꺼내본 ‘새마을지도자증’ 고대면 성산1리에는 경로당이 두 곳이 있다. 보통 마을에 하나씩 있는데 성산1리는 지난 2010년 기존 경로당과 별도로 ‘속사경로당’이 지어졌다. 기존의 마을 경로당은 1·2반 노인들이 이용하기에 쉽지 않았기 때문에 2km가 넘는 거리에 위치해 있고, 가운데 들판이 있어 먼 길을 둘러가야 했다. 눈, 비가 오면 1·2반 노인들은 전혀 경로당을 이용할 수 없었다.이 같은 불편이 계속되면서 2010년 1·
석문면 교로리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내다, 사업하는 아버지를 따라 인천에서 자랐다. 경희대학교의 전신인 신흥대에 입학했다. 기계체조를 했던 나는 건강만큼은 자신 있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찾아온 사고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인천에서 꽤 잘나가던 재생타이어 공장을 운영했는데, 생산라인에서 부품이 튕겨져나와 머리에 떨어졌다고. 지금도 이마 한쪽이 함몰돼 있다. 다행히 가까스로 살아났지만, 9년 만에 후유증으로 길에서 쓰러져버렸다. 병명도 없었다. 하릴없이 경기도 이천에 거처를 마련하고 요양을 하면서 끄적끄적 낙서를 하기 시작한 게
지난해 당진문화재단에서는 원도심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를 발간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이기도 하고 또 떠나기도 하면서 이야기를 만들어낸 원도심에 대해 당시 사진과 함께 지역의 원로 4명을 인터뷰해 구술을 채록한 사업이다. 누군가의 인생은 지역의 역사가 되기도 한다. 책 속에 잠들어 있기엔 아쉬운 이야기 중 일부를 발췌해 지면에 싣는다.정리 임아연 기자 zelkova87@hanmail.net “내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읍내의 기억은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을 때인 거 같아. 그때 당진에 양복집이 두어
1. 이 사진은 당진상업고등학교(현 당진정보고) 졸업사진을 찍던 날 남산에서 친구들과 춤추던 모습이다. 오른쪽에서 세 번째 검은색 목티를 입은 사람이 나다. 당시 유행을 따라 교복 바지가 모두 나팔바지다. 이 사진은 졸업 앨범에도 올랐는데 사진 제목이 ‘휴식시간에 열을 올리는 GO GO 부대’다. 당시 고고춤이 유행이었던 기억이 난다. 2. 이 사진은 강원도 인제군 원통면에서 복무하던 시절 하사관이었던 나와 소대장들이 함께 찍은 사진이다.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하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내가 복무한 인제군 원통
나는 15년 전 당진에 왔다. 고향 홍성에서, 근무하는 서울을 오가려면 일주일에 두세 번씩 당진을 거쳐야 했기 때문에, 당진은 나에게 친숙한 도시였다.나는 환절기 때마다 감기에 걸려 항상 힘들었다. 물 맑고 공기 좋은 곳을 찾다가 고향과도 가깝고 익숙했던 당진으로 오게 됐다. 이곳에 와서 지금은 당진외국인교회 목사로, 그리고 국방전우신문 충남지사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1. 63명 중 6명만 고교 진학1956년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 모습이다. 나는 홍성군 홍북면 출신으로 홍북국민학교를 졸업했다. 세 번째 줄 왼쪽에서
1. 월남 파병을 마치고이 사진은 월남 파병을 마치고 제대한 후 기념으로 찍은 사진이다. 당시 나이가 25세였다. 나는 1970년 7월 가족을 비롯해 많은 이들에게 환송받으며 월남전에 참전하기 위해 베트남으로 떠났다. 부산항에서 출발해 일주일이 지나서야 다낭을 거쳐 나트랑에 도착했고, 또 3일 후에 C130 수송기를 타고나서야 사이공 주월한국군사령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착한 날 사령부에서 위문공연이 있어 자리를 비운 사이 헌병대가 공격을 받아 건물 일부가 파손돼 긴장속에서 복무를 시작했다. 2년간의 복무를 마치고 베트남을 떠나기
1. 부산공항에 마중나온 가족들나는 1969년부터 1년 반 동안 월남전에 참전하기 위해 베트남에서 복무했다. 이 사진은 그때 함께했던 전우들과 찍은 사진이다. 나는 지원해서 월남전에 참여했다. 그때는 죽을 수도 있다는 걸 몰랐을 정도로 젊었고, 하고 싶었기에 지원했다. 동네에서 꽤 부유한 집안의 외아들이었던 내가 그냥 베트남에 가버렸으니 고향에 남아있던 가족들이 많이 걱정했을 것이다. 그렇게 떠났다가 복무를 마치고 부산 공항으로 귀국하던 날, 그때 온 가족이 마중나왔던 것이 기억난다. 2. 아버지 환갑잔치내 나이 서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