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재선 위원장은·1959년 합덕읍 합덕리 출생·합덕초·합덕중 졸업·전 연호라이온스클럽 회장(2013-2014)·전 국제라이온스협회 356-F지구 제13지역 부총재(2014-2016)·전 합덕읍체육회장(2014-2017)·현 합덕읍개발위원장·현 에스엠 전설 대표 합덕읍 합덕리에서 나고 자란 나는 고향에 대한 애정이 크다. 그만큼 침체를 겪고 있는 합덕의 모습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어릴 적 나는 여름철에는 참외, 수박 서리를 하고, 석우천 등에서 친구들과 수영을 하며 놀았다. 또 가을이면 메뚜기를 잡고 놀았던 기억이 아직도
>>인순희 부회장은·1940년 석문면 통정2리 출생(올해 79세)·석문초, 석문중 졸업·석문면 통정2리 부녀회장, 석문면 부녀회장, 당진군 부녀회장 역임·현 대한노인회 석문면분회 부회장 석문면 통정2리 출신인 나는 석문초, 석문중을 졸업했다. 이후 인천에서 미용기술을 배워 미용실에서 일했다. 그러다 19살에 부모님을 모시고 살고자 다시 고향 당진으로 내려왔다. 나는 22세 때부터 마을 일을 시작했다. 이후 24세에 결혼해 석문미용실을 10년 간 운영했고, 남편과 나는 슬하에 아들 3명을 낳아 길렀다.하지만 1977년 남편이 암으로
송악읍 반촌2리 토박이인 나는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형편이 어려워 18세의 나이로 우체국에 취업했다. 아끼며 생활했고, 일과 동시에 농사도 지었다. 배움의 한을 풀고자 뒤늦게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입학해 공부를 하기도 했다. 한편 생전 사진을 찾아보지 않다가, 어젯밤 앨범을 뒤적이며 옛날 사진을 보았다. 현재와는 다른 송악읍의 모습이 담긴 사진들이 많더라. 감회가 새로웠다.나는 지난 2014년부터 송악읍 반촌2리 이장을 맡아 주민들과 함께 열심히 마을 가꾸기에 힘써왔다. 그 결과 반촌2리가 우리마을 사랑운동으로 최우수상 등을
>>이종두 회장은·1942년 석문면 삼봉4리 출생 ·삼봉초·중 졸업 ·삼봉초 33년 간 근무·석문면 4-H 회장 ·삼봉감리교회 은퇴장로 ·전 석문면 삼봉4리 이장·삼봉감리교회 은퇴장로 ·현 석문면 삼봉4리 노인회장 석문면 삼봉4리 토박이인 나는 삼봉초등학교에서 33년 간 기능직 공무원으로 근무했다. 그래서 1999년 대통령 근정포장을 수상하기도 하고, 2002년부터 2007년까지 삼봉4리 이장을 맡으면서 행정자치부장관 표창을 받기도 했다. 그만큼 내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며 살아왔다. 내 고향이자 나의 터전인 삼봉4리는 점점 발전
이상옥서양화가>>이상옥 서양화가는- 대구대 미술대학 회화과 졸업- 현 (사)한국미술협회 당진지부, 충나현대미술작가협회 등 회원- 현 학동인회 회장 어느덧 막내아들 진호가 다 커서 결혼을 한다. 올해 27세인 아들은 아직도 내 눈엔 어리기만 한데, 이제 부모 품을 떠나 새로운 가정을 꾸린다고 하니 느낌이 새롭다. 지난해 여름 진호가 결혼해도 되냐고 물었을 때, ‘아들이 언제 이렇게 컸지’하는 생각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동시에 못해준 게 생각나 미안한 마음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더 많이 안아줄 걸 하는 아쉬움도 들었다. 이런 내
강미남고대면 적십자봉사회 회장>>강미남 회장은-1958년 고대면 옥현리 출신-고대초 32회 졸업-전 새마을 고대면 장항2리부녀회·고대면 생활개선회 ·고대농협 농가주부모임 회장 역임-현 고대면 적십자봉사회 회장 고대면 옥현리에서 나고 자란 나는 현재 고대면 적십자봉사회 회장을 맡고 있다. 5년간 총무를 맡다, 올해 회장으로 선출돼 활동하고 있다. 밭농사도 짓고, 소도 키우고 있어 하루하루를 바쁘게 보낸다. 스마트폰에 기록해놓은 내 스케줄 표를 보고 다들 놀랄 정도다.나는 그동안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많이 찍어놨지만, 얼마전 사진이 모두
나는 송산면 상거리 출신으로, 현재는 시곡1통에 살고 있다. 새마을지도자 당진3동협의회장을 맡고 있으며, 남에게 베푸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동안 받은 도움의 손길을 보답하고 싶어 봉사를 시작했다. 봉사는 육체적인 활동보다 봉사자의 마음가짐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짧은 시간이라도 봉사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이 참 봉사다. 남에게 주는 행복, 나누는 행복 만큼 더 큰 행복은 없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 사진은 아내(임영옥)와 연애하면서 강원도로 놀러갔을 때 찍은 사진이다. 이 사진은여행을 함께 간
집에 옛날 사진이 참 많다. 젊었을 때, 사회활동을 왕성하게 했을 당시 사진을 보면 그때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여생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끝까지 열심히 살고 싶다. 맡은 바 소임을 다하고 싶다. 첫 번째 사진은 올해 면천향교 전교로 취임하고 성균관에서 고유 받을 때 찍었던 사진이다.성균관에서 각 지역 향교의 전교들과 사진촬영을 했다. 어릴 적부터 조상을 숭배해왔던 나는 꾸준히 유림생활을 해왔다. 농업에 종사하면서 농촌지도자 충청남도연합회장과 중앙회 부회장 등을 맡았기 때문에 본격적인 유림생활은 단체장 임기가 끝난 후
어젯밤 그동안 정리해 놓은 앨범을 꺼내 사진을 찾아봤다. 사진 속에는 10대, 20대, 30대의 내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있더라. 확실히 20대 때가 가장 예뻤던 거 같다. 부산 출신의 내가 당진을 찾은 지 벌써 22년이 됐다. 결혼 후 부산에서 살다가, 남편의 고향인 당진을 오게 됐다. 이제는 부산보다 당진이 더 편하고, 고향 같다고 느껴진다. 첫 번째 사진은 6~7살 때 집에서 찍은 사진이다. 이 사진을 찍은 아버지는 가전제품에 관심이 많으셨다. 부서진 TV, 고장 난 라디오, 못 쓰는 시계와 카메라 등을 얻어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찍어 온 사진들이 많다. 초등, 중등, 고등, 대학, 군생활 등 시기 별로 나눠 앨범으로 정리해 놓았을 정도다. 나는 호서중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체육을 가르치고 있는데, 아이들과 함께 하는 모습을 사진으로도 많이 남겨 놓는다. 가끔은 아이들이 핸드폰을 가져가 사진을 찍어 놓기도 한다. 덕분에 추억이 오랫동안 남겨지는 것 같다. 1.나는 고대면 대촌리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운동을 좋아해서 체육 교사 혹은 경찰이 되고
경기도 화성시에서 태어난 나는 해방된 후 13살 때(1945년) 당진에 오게 됐다.당진초를 졸업하고 인천으로 유학 가 학창시절을 보냈다. 직장 때문에 강원도 강릉에서 10년을 살다 다시 당진을 찾았다. 25년 간 박용성 법무사의 일을 돕다가, 79세 때 퇴임했다.나이가 많이 들었어도 일에 대한 열정이 있었기에 계속해서 일을 했다. 내 인생철학은 “적 없이 살고, 서로 정을 나누면서 살자”이다. 여생을 인생철학과 같이 살고 싶다. 첫 번째, 두 번째 사진은 아내와 유럽여행을 갔을 때 찍은 사진이다.환갑을
인천광역시 가정동 출신의 나는 중매로 군인인 남편을 만나, 남편의 고향인 우강면 송산1리에 왔다. 당시 내 나이 23세였다. 올해 72세이니, 당진에 온 지 벌써 50년이 됐다.나는 담배농사를 지었다. 하지만 다리수술을 하는 바람에 지금은 작게 농사를 짓고 있으며, 취미생활을 즐기고 있다. 요즘 나의 취미는 게이트볼과 라인댄스를 추는 것이다.예전엔 사진 찍히는 것을 좋아했지만 나이가 들면서 거울도 잘 보지 않게 되고, 이제는 사진 찍는 것도 망설여진다. 그래도 옛날에 찍어놓은 사진은 잘 보관하고 있다. 첫 번째 사진은
나는 사진을 찍는 것도 좋아하지만, 찍히는 것 또한 무척 좋아한다. 그래서 보관하고 있는 사진이 많다. 그동안 모아둔 앨범을 오랜만에 뒤적거렸다. 옛 사진을 보니 추억에 잠겨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난 11세 때 아버지를 여의였다. 홀로 5남매를 키운 어머니는 내 결혼식을 앞두고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전 어머니가 많이 편찮으셔서 직장생활을 그만 두고, 어머니를 간병했다. 그래서인지 내게 ‘엄마’, ‘어머니’라는 단어는 애틋하고 그리운 단어다. 이번에 앨범을 보다, 내게 딱 한 장 남아있는 어머니의 젊은 모습이 담긴 사진을 보았다.
나는 인천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어릴 때는 군인인 아버지를 따라 이사를 많이 다녔다.당진에 온 지는 32년 정도 된 것 같다. 30세의 나이에 연고가 없는 당진을 찾았다. 젖소목장을 운영하는 아버지의 일을 돕다 목장 운영에 매력을 느껴 내 소유의 젖소목장을 운영하고자 당진으로 왔다. 30년 간 젖소농장을 운영했지만, 3년 전 부터는 우유를 짜고 있진 않다. 우유짜는 일은 정해진 시간에 해야하고, 가족같은 소들이 아플 때면 일을 하면서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그러다 보니 몸과 마음이 상하더라. 그래서 지금은 착유를 하지 않고 있다
송악읍 중흥리 토박이인 나는 송악초·중·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놀기 좋아했던 나는 학창시절 친구들과 어울리며 찍은 사진을 많이 갖고 있다. 현재도 당시의 사진을 잘 보관해두고 있다. 종종 앨범 속 사진을 스마트폰으로 찍어, 친구들에게 보내주곤 한다.한편 나는 약 15년 간 당진시자율방범연합대 송악읍지대에서 재무, 총무 등 임원으로 활동하다가, 지난해 말 송악읍지대장을 맡았다. 당진시자율방범연합대 송악읍지대 활동에만 집중하고 싶어, 현재 타 사회단체 활동은 하지 않고 있다. 우리 송악읍지대의 가장 큰 장점은 회원 모두가 솔선수범하다는
합덕에서 나는 아내와 함께 20년 간 상신마트를 운영해오고 있다. 올해부터는 새마을지도자 합덕읍협의회장까지 맡게 돼 어깨가 무겁다. 그러나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할 때마다 뿌듯하다. 또한 열심히 함께 봉사하는 회원들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예전부터 나는 사진 촬영에 관심이 많았다. 카메라도 소유하고 있어 사진을 많이 찍으러 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요즘엔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다보니, 사진을 인화하기 보다는 꼭 필요한 사진만 컴퓨터로 프린트하게 된다. 취재를 위해 내 모습이 찍힌 사진을 찾는데, 찍기만 하다 보니 내가 찍힌 사진은 거의
우강면 송산1리에서 태어난 나는 군 제대 후 45년 동안 화물차를 운전하며 가족을 부양했다.운전하는 일을 했기때문에 전국 방방곡곡 가보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현재는 벼농사를 짓고 있으며, 농사를 지은 지는 10년도 채 되지 않았다.나의 취미는 한궁이다. 2011년부터 한궁을 시작했다. 한궁은 한국에서 개발한 경기로 우리나라의 전통놀이인 투호와 전통무예인 궁도를 결합한 스포츠다. 양손 운동을 통해 집중력을 키우고 유연성과 근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 특히 몸에 무리가 적고 노인들의 치매 예방에도 좋다고 알려져 있다. 요즘엔 날이
고대면 진관2리 토박이인 나는 군 제대 후 1964년 3월1일 정식 교사로 채용돼, 고산초등학교를 시작으로 당진지역 다수의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2002년 퇴임했으니, 약 40년 교사 생활을 한 것이다. 나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교직생활을 하게 됐고, 현재 둘째아들 역시 교사로 근무하고 있다.한편 나는 운동을 좋아하고, 소속된 모임이 많아 그동안 찍어놓은 사진이 많다. 옛날사진을 찾느라 집안 곳곳을 들여다봤다. 다행히 아내가 옛날에 찍은 사진을 사진첩에 잘 정리해 놓았다.나는 앞으로 남은 인생을 모두에게 감사하며 살아가고자 한
나는 신평면 초대리에서 태어나, 전대초등학교와 신평중·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배목수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목공예를 공부했으나 대학 시절 도자기의 매력을 느껴 전남도립대에서 도자산업디자인을 전공했다.나는 주로 생활자기를 만들고 있다. 당진시 관광기념품을 비롯한 경남 거제시 외도의 십자가를 축소 제작한 관광기념품을 만들었다. 또한 나는 산업도자기도 만들었는데, 전국 치과 타구 70%가 내 손에서 탄생했다. 중국, 미국, 일본 등에서도 공방에 다양한 제품을 의뢰하곤 한다. 또한 나는 원두를 로스팅하는 기계, 원두를 가는 약연 등의 기계를
원당리에서 태어난 나는 1950년 대에 대호지면 마중리로 이사왔다. 지금 내가 살고있는 이 집은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 아버지(정진흥)를 모신 집으로, 우리 가족의 역사가 담겨있는 집이다. 나는 젊은 시절 당진군청에서 근무했으며 지금은 당진향교에서 전교를 맡고 있다.유림생활부터 수석장의, 성균관 유도회 당진지부회장으로 활동하다 지난해 전교로 취임했다. 당진향교에서는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강조하며 충효교실 등을 운영하고 있다. 특히 지난 해는 당진초등학교 전학년을 대상으로 충효교실을 운영했으며, 새해에는 향교에서 사서(대하·논어